손호영(孫昊永)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90D638C601B1827X0 |
이명(異名) | 손호익(孫昊翼) |
자(字) | 치현(致玄) |
호(號) | 항재(恒齋) |
생년 | 1827(순조 27) |
졸년 | 1859(철종 10)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조부 | 손성징(孫星澄) |
증조부 | 손용구(孫龍九) |
처부 | 전경복(全敬福) |
외조부 | 우복인(禹福仁) |
출신지 | 경상남도 밀양(密陽) |
묘소 | 승학산(升鶴山) |
저서 | 『항재유고(恒齋遺稿)』 |

[상세내용]
손호영(孫昊永)
1827년(순조 27)∼1859년(철종 10).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치현(致玄), 호는 항재(恒齋)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출신지는 경상남도 밀양(密陽)이다.
증조부는 증한성부좌윤(贈漢城府左尹) 손용구(孫龍九), 조부는 수 동지중추부사(壽同知中樞府使) 손성징(孫星澄)이다. 외조부는 단양우씨(丹陽禹氏) 우복인(禹福仁)이고, 처부는 천안(天安) 전경복(全敬福)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랐으며 문예에 뛰어났다. 16세에 영남루(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內一洞) 밀양강가에 위치한 누각) 강회(講會)에 나가 부시(賦詩)에 대하여 질의하므로 이후인(李侯寅)이 크게 칭찬하였다.
그의 나이 26세인 1852년(철종 3)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0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서도 책을 놓지 않고 독서에 더욱 진력하였으며, 일에 임하기 전에 매일 삼성사물(三省四勿: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에서 증자(曾子)가 말한 세 가지 살필 것(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과 안연(顔淵)편에서 공자가 안연에게 말한 네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과 여러 잠언을 암송하였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통선랑(通善郞),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858년(철종 9)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지냈다. 이치를 궁리하는 재주와 역(易)에도 밝아 동조(同朝)에서 모두들 ‘노성인(老成人)’이라고 불렀다.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 직산군수(稷山郡守)를 지냈는데, 선정(善政)을 베풀어 두 지역에 모두 그의 유혜비(遺惠碑)가 건립되었다.
연행(燕行: 사신으로서 중국에 감)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임무수행중 병을 얻어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지는 승학산(升鶴山) 경좌(庚坐)이다.
저술로 시문집 『항재유고(恒齋遺稿)』가 있는데, 1900년(광무 4) 남병기(南炳基)가 간행한 석인본 2권 1책이다.
증조부는 증한성부좌윤(贈漢城府左尹) 손용구(孫龍九), 조부는 수 동지중추부사(壽同知中樞府使) 손성징(孫星澄)이다. 외조부는 단양우씨(丹陽禹氏) 우복인(禹福仁)이고, 처부는 천안(天安) 전경복(全敬福)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랐으며 문예에 뛰어났다. 16세에 영남루(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內一洞) 밀양강가에 위치한 누각) 강회(講會)에 나가 부시(賦詩)에 대하여 질의하므로 이후인(李侯寅)이 크게 칭찬하였다.
그의 나이 26세인 1852년(철종 3)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0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서도 책을 놓지 않고 독서에 더욱 진력하였으며, 일에 임하기 전에 매일 삼성사물(三省四勿: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에서 증자(曾子)가 말한 세 가지 살필 것(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과 안연(顔淵)편에서 공자가 안연에게 말한 네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과 여러 잠언을 암송하였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통선랑(通善郞),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858년(철종 9)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지냈다. 이치를 궁리하는 재주와 역(易)에도 밝아 동조(同朝)에서 모두들 ‘노성인(老成人)’이라고 불렀다.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 직산군수(稷山郡守)를 지냈는데, 선정(善政)을 베풀어 두 지역에 모두 그의 유혜비(遺惠碑)가 건립되었다.
연행(燕行: 사신으로서 중국에 감)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임무수행중 병을 얻어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지는 승학산(升鶴山) 경좌(庚坐)이다.
저술로 시문집 『항재유고(恒齋遺稿)』가 있는데, 1900년(광무 4) 남병기(南炳基)가 간행한 석인본 2권 1책이다.
[참고문헌]
恒齋先生文集
[집필자]
전주원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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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