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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최응(李最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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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양백(良伯)
호(號)산향(山響)
시호(諡號)충익(忠翼)
생년1815(순조 15)
졸년1882(고종 19)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구(李球)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최응(李最應)
1815년(순조 15)∼1882년(고종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아들이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형으로 흥인군(興寅君)에 봉하여졌으며, 민씨정권의 주요인물이다.

경복궁 중건으로 1865년(고종 2)4월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고 9월에는 판의금부사호위대장 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정권에서는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였고,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에야 요직에 등용되기 시작하여, 그해 12월 좌의정이 되었고, 1878년 영의정이 되었다.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의 설치로 영의정총리대신으로 바뀜에 따라 총리대신이 되었으나 1881년 유림들의 반대로 사직하고 한직인 영돈녕부사를 지냈다.

1882년 잠시 광주부유수를 지낸 뒤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나, 그해 6월 10일 임오군란 때 폭동군인이 그의 집을 습격하였고 그때 살해되었다.

대원군이 당백전제도를 시행하자 그것을 비판하여 “일문전(一文錢)이 어찌 백문전(百文錢)으로 쓰이겠는가? 다만, 일문의 가치로만 쓰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물건값을 치를 때에도 그런 식으로 계산하였기 때문에 이익을 얻은 상인이 많았다고 한다.

1881년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때 유림들의 비판을 받았는데, 홍재학(洪在鶴)의 상소문에서는 이최응의 처형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그는 홍재학 등의 취조관(委官)이 되어 홍재학에게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조약체결 때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에 갔던 김홍집일행이 『조선책략』을 가져와서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야 한다는 논의(聯美論)를 일으키자, “미국은 본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니 서계(書契)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년 9월 8일 연미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이에 고종도 병인‧신미 양요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여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어 1881년 1월 지난해 6월 자신이 미국사신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는 주장(奏章)을 톈진(天津)으로 가는 영선사 유학생을 통하여 중국에 보냈다.

그러나 주화‧척화‧개국 등에 관하여 뚜렷한 주관이 없이 모두 옳다고 한 데서 당시 사람들은 ‘유유정승(唯唯政丞)’이라고 불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었으나 1905년 문충(文忠)으로 다시 내려졌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梅泉野錄
韓國史―最近世篇―(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61)

[집필자]

이상찬(李相燦)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