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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현(趙秉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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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길(景吉)
호(號)우당(羽堂)
생년1791(정조 15)
졸년1849(철종 즉위)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득영(趙得永)
저서『성재집』

[상세내용]

조병현(趙秉鉉)
1791년(정조 15)∼1849년(철종 즉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길(景吉), 호는 성재(成齋)우당(羽堂). 이조판서 조득영(趙得永)의 아들이다.

1822년(순조 2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교리를 거쳐 1827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뒤 조만영(趙萬永)조인영(趙寅永)조병구(趙秉龜) 등과 함께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어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권력다툼을 벌이는 데 앞장섰다.

1832년 세자시강원겸보덕(兼輔德), 이듬해에는 공충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838년(헌종 4) 예조판서에 올랐다. 다음해 병조판서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때 그는 안동김씨를 배척하는 벽파(僻派)의 실권자로서 천주교를 탄압, 앵베르(Imbert, 范世享)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모방(Maubant, 羅伯多祿)신부 등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을 살육하는 기해박해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40년 호조판서로 전임하여 『동문휘고(同文彙考)』 편찬 때 교정당상(校正堂上)을 겸하였으며, 그뒤 이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1844년 좌참찬에 올랐다가 과거부정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뒤 병조판서규장각제학예조판서홍문관대제학 등을 지내고, 1847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다. 이해 안동김씨파의 정언 윤행복(尹行福), 대사헌 이목연(李穆淵) 등의 탄핵상소를 받아 거제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으나 정언 강한혁(姜漢赫), 대사헌 이경재(李景在) 등의 탄핵을 받아 1849년 6월 철종의 즉위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하자 다시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그해 9월 사사되었다.

저서로 『성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집필자]

김옥희(金玉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