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모(洪敬謨)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64DACBDBAA8B1774X0 |
자(字) | 경수(敬修) |
호(號) | 운석일민(耘石逸民) |
시호(諡號) | 문정(文貞) |
생년 | 1774(영조 50) |
졸년 | 1851(철종 2)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풍산(豊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홍낙원(洪樂源) |
모 | 전주이씨(全州李氏) |
조부 | 홍양호(洪良浩) |
외조부 | 이존원(李存遠) |
저서 | 『관암전서』 |

[관련정보]
[상세내용]
홍경모(洪敬謨)
1774년(영조 50)∼1851년(철종 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수(敬修), 호는 관암(冠巖) 또는 운석일민(耘石逸民).
이조판서를 지낸 홍양호(洪良浩)의 손자로, 이조판서 홍낙원(洪樂源)의 아들이며, 모친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사간원정언 이존원(李存遠)의 딸이다.
정조 때 동몽교관으로 경연(經筵)에서 『효경』을 강론하였고, 오언시를 지어 정조로부터 서책과 패향(佩香)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805년(순조 5) 성균관유생이 되었고, 181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해에 시독관(侍讀官)으로서 홍문관에 장서가 없음을 개탄하고 계청(啓請)하여 『예기』‧『주역』‧『퇴계집(退溪集)』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뒤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관리등용의 실책으로 한때 법성첨절사(法聖僉節使)로 좌천되기도 하였다가 곧 중용되어 1830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1834년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헌종 때 대사헌을 거쳐 이조‧예조‧호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독서를 즐겨 장서가 많았으며,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관암전서』 32책 외에 『관암외사(冠巖外史)』‧『관암유사(冠巖遊史)』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대동장고(大東掌攷)』‧『기사지(耆社志)』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조판서를 지낸 홍양호(洪良浩)의 손자로, 이조판서 홍낙원(洪樂源)의 아들이며, 모친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사간원정언 이존원(李存遠)의 딸이다.
정조 때 동몽교관으로 경연(經筵)에서 『효경』을 강론하였고, 오언시를 지어 정조로부터 서책과 패향(佩香)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805년(순조 5) 성균관유생이 되었고, 181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해에 시독관(侍讀官)으로서 홍문관에 장서가 없음을 개탄하고 계청(啓請)하여 『예기』‧『주역』‧『퇴계집(退溪集)』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뒤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관리등용의 실책으로 한때 법성첨절사(法聖僉節使)로 좌천되기도 하였다가 곧 중용되어 1830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1834년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헌종 때 대사헌을 거쳐 이조‧예조‧호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독서를 즐겨 장서가 많았으며,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관암전서』 32책 외에 『관암외사(冠巖外史)』‧『관암유사(冠巖遊史)』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대동장고(大東掌攷)』‧『기사지(耆社志)』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冠巖全書
憲宗實錄
冠巖全書
[집필자]
조기대(趙基大)
��� : "������(������)"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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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