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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노숭(沈魯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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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태등(泰登)
호(號)효전(孝田)
생년1762(영조 38)
졸년1837(헌종 3)
시대조선후기
본관청송(靑松)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심낙수(沈樂洙)
한산이씨(韓山李氏)
조부심형운(沈亨雲)
처부이의술(李義述)
외조부이사질(李思質)

[상세내용]

심노숭(沈魯崇)
1762년(영조 38)∼1837년(헌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태등(泰登), 호는 몽산거사(夢山居士)효전(孝田).

조부는 심형운(沈亨雲)이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제주목사(濟州牧師)를 역임한 통훈대부(通訓大夫) 심낙수(沈樂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심낙수는 노론 시파로 벽파 공격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모친은 한산이씨(韓山李氏) 이사질(李思質)의 차녀이고, 부인은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의술(李義述)의 딸이다. 동생 심노암(沈魯巖)은 1795년(정조 19) 을묘식년사마시(乙卯式年司馬試)에 생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심노숭은 1783∼1784년을 전후로 성균관에 들어갔고 1790년(정조 14) 경술증광사마시(庚戌增廣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몸이 몹시 허약하여 병에 시달렸으나 사대기서(四大奇書) 및 『서상기(西廂記)』 같은 중국 소설에도 탐닉하였고 부친의 임소를 왕래하면서 호색과 풍류를 일삼으면서 과거 공부와 시문 창작에 몰두하였다.

1797년에 정민시(鄭民始)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801년(순조 1)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시파의 핵심인물이었던 부친 심낙수는 관직이 추삭(追削)되었고, 심노숭도 ‘배치의리(背馳義理), 장해선류(戕害善類)’로 지목되어 1801년 2월에 경남 기장현(機張縣)으로 유배되었다. 1806년 정순왕후의 승하를 시작으로 벽파정권이 무너지자 그도 해배되었다. 그는 이 6년의 유배기간 동안 38책의 『효전산고(孝田散稿)』를 지었다.

1809년(순조 9)에 직장(直長)에 임명되었으나, 1811년 아우 상과 이듬해 모친상을 연달아 겪었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학의 동반자였던 아우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어 이후 5년간 시작(詩作)을 폐하였다. 1815년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시작으로 논산현감(論山縣監), 천안군수(天安郡守), 광주판관(廣州判官), 임천군수(林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816년 논산현감으로 있을 때 연산현감(連山縣監)김려(金鑢)와 교유하면서 그의 야사 편찬에 크게 고무되어, 1821년(순조 21) 광주판관으로 있을 때 『대동패림(大東稗林)』의 편찬을 마쳤다. 그는 1825년(순조 25) 임천군수에서 파직된 후 파주에 우거하다 1837년(헌종 3) 1월 76세로 죽었다.

첫 번째 아내 이씨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으나 둘째 딸을 제외하고 모두 일찍 죽었고 1792년(정조 16)에 아내마저 죽자, 1794년(정조 18)에 재취를 얻어 1811년(순조 11) 50세 때에 비로소 아들 심원신(沈遠愼)을 얻게 되었다.

심노숭홍지섭(洪志燮), 임이주(任履周), 서준보(徐俊輔), 강이천(姜彛天), 김조순(金祖淳), 김려(金鑢), 김노경(金魯敬), 김겸(金鎌), 김기서(金箕書), 강준흠(姜浚欽), 권비응(勸丕應), 김상휴(金相休), 조학은(趙學殷)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당시의 정치 실세인 노론이었으면서도 자당에 비판적 이야기를 서슴지 않았고 인조반정후 계속된 벌열과 사림의 결탁, 정주학의 정치수단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보였다.

심노숭『효전산고(孝田散稿)』, 『적선세가(積善世家)』를 지었으며 『단향연축(丹香聯軸)』, 『대동패림』, 『지사록(志事錄)』, 『은파산고(恩坡散稿)』를 편찬하였고 『정변록(定辨錄)』을 산정(删定)하였다. 그의 문학론은 감정의 순화와 절제를 강조하였고, 따라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의 표출을 제약하였던 성리학적 시문관에서 탈피하여 인간 개체의 다종다양하며 진실된 욕구와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을 시문의 본령으로 여겼다. 전범에 대한 지나친 추수(追隨)로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병폐를 보인 의고문(擬古文)을 강력히 거부하면서 다소 속될지라도 진실성과 활기가 문학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그는 또한 시대적 금기인 패사소품을 비롯한 다양한 속문화(俗文化)들을 적극 옹호하면서 자신의 문학의 자양분으로 섭취하였다. 작가가 가지는 문학론이 반드시 그의 작품으로 전부 그대로 표출되는 것은 아닌데, 심노숭의 문학작품에서는 그 둘이 아주 밀착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丹香聯軸
大東稗林
恩坡散稿
積善世家
定辨錄
志事錄
孝田散稿

[집필자]

이관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