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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원(趙萬元)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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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태시(泰始)
시호(諡號)문정(文靖)
생년1762(영조 38)
졸년1822(순조 22)
시대조선후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상존(趙象存)

[상세내용]

조만원(趙萬元)
1762년(영조 38)∼1822년(순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태시(泰始). 소론의 영수 조지겸(趙持謙)의 6세손으로, 부사 조상존(趙象存)의 아들이다.

1790년(정조 14) 향시에서 수석을 하였으나, 호적이 누락되어 있어 제적되자 정조의 특명으로 부내에 집을 지었다.

2년 뒤 정조가 화성에 거둥하면서 친히 베푼 시험에 뽑혀 진사가 되고, 179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기주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림회권(翰林會圈)에 뽑히고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되는 등 정조의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이후 부교리정언지평이조병조 낭관을 거쳤고, 초계시(抄啓試)에서 세번 수석을 하여 4품에 오른 뒤 부안현령이 되었다.

1802년(순조 2) 승정원승지대사간이조참의형조참의자산부사가 되었고, 1809년 이후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참판을 거쳤으며, 1818년에 부사로서 연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다음해 대사성을 거쳐 강화유수가 되어서는 세금감면‧향약실시에 노력하였고, 1821년에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며, 동지정사(冬至正使)로서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다음해 한성판윤 겸 지경연사(漢城判尹兼知經筵事)로 재직중 사망하였다.

성격이 밝으면서 부드럽고 깊이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독서에 전념하였고 안분순명(安分順命)을 규범으로 삼아 생활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經山集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대표명조만원(趙萬元)
만원(万源), 만원(萬元)
성명조만원(趙萬元)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