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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신(權日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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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오(省吾)
호(號)직암(稷庵)
생년1751(영조 27)
졸년1791(정조 15)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학자 > 유생
권흠(權歆)
출신지갈산

[상세내용]

권일신(權日身)
1751년(영조 27)∼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학자‧천주교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오(省吾), 호는 직암(稷庵), 세례명은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갈산 출신. 권근(權近)의 후손이며, 부친은 관찰사 권흠(權歆)이며, 형은 권철신(權哲身)이다.

남인계의 학자로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1782년(정조 6)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온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프란시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뒤 이벽이승훈과 함께 포교에 전력하여 충청도 내포(內浦)이존창(李存倉, 혹은 李端源)을 입교시키고, 또 전주유항검(柳恒儉)을 개종시켰다.

1785년에는 서울 명례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식으로 교회집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지만 학행(學行)과 가문으로 인하여 무사하였다.

그뒤 1786년에 이벽이 사망하자 조선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조동섬(趙東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에 들어가 8일간 피정(避靜)하면서 신앙을 더욱 두텁게 하였다. 그리고 추조적발사건으로 흩어졌던 초대교회의 주역들인 이승훈정약용(丁若鏞)형제 등과 함께 더욱 견고한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세웠다.

이것을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교(主敎)가 되었고 다른 동료교우들인 이승훈정약종최창현이단원유항검 등은 각기 신부로 지명되어 본격적으로 천주교 사목(司牧)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789년에 이들 가성직자의 유효성에 대한 의혹이 일어나 북경 주교 구베아(Gouvea, A.)에게 문의, 그들의 사제성직(司祭聖職)의 집행이 부당한 것임을 알게 되자, 1790년 즉시 평신도로 되돌아갔다.

최창현(崔昌顯)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욱 열심히 천주교 포교에 전력하다가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홍낙안(洪樂安)목만중(睦萬中)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자질과 덕망을 높이 평가받던 터라 제주도로 유배하는 데 그쳤으나, 제주목사로 하여금 한달에 세번씩 신문하라는 하교를 첨가시켰다.

당시 유배지로 출발하기 위하여 서울에 있는 매부 이윤하(李潤夏)의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행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정조의 명령을 받은 별감 몇명이 와서 당시 80세가 된 어머니와 천리나 되는 배소지 제주의 거리를 다시금 환기시키며 천주교와 유교에 대한 애매한 글귀를 내놓고 수결(手決)하기를 권하자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맡기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예산으로 유배지가 바뀌게는 되었지만, 한편으로 달레(Dallet, C. C.)『한국천주교회사』에는 부모에 대한 지나친 인성적(人性的) 사랑으로 말미암아 배교하고 말았다고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그뒤 예산으로 유배가던 중 혹심하였던 장독으로 인하여 주막에서 사망하였다.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난 학자로서 서학에 일생을 종사하다가 순교한 것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朝鮮基督敎及外交史(李能和, 1928)
西學의 受容과 그 意識構造(金玉姬, 韓國史論 1, 서울大學校人文大學國史學科, 1973)

[집필자]

김옥희(金玉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