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한(柳星漢)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0C131D55CB1750X0 |
자(字) | 원명(原明) |
생년 | 1750(영조 26) |
졸년 | 1794(정조 18)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진주(晉州[土])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유사문(柳師文) |
조부 | 유만건(柳萬健) |
증조부 | 유복삼(柳復三) |
외조부 | 이합(李柙) |
[상세내용]
유성한(柳星漢)
1750년(영조 26)∼1794년(정조 18). 본관은 진주(晉州[土]). 자는 원명(原明).
증조부는 유복삼(柳復三), 조부는 유만건(柳萬健)이고, 부친은 유사문(柳師文)이며, 외조부는 여창군(礪昌君) 이합(李柙)이다.
1777(정조 1)년 정유(丁酉)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1위로 장원(壯元) 급제하였다. 김창협(金昌協)의 손자로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절충적 입장인 낙론(洛論) 대표자 김원행(金元行)을 사사하였다.
관직으로 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다.
1792년(정조 16)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별시(別試)를 치룬 것에 대해, 왕이 경연에는 참석치 않고 유흥만 즐긴다며, 도산서원 별시에 대한 노론(老論)의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상소를 올려, 영남 선비들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리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로 인해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正祖)는 끝까지 벌을 주지 않았다.
증조부는 유복삼(柳復三), 조부는 유만건(柳萬健)이고, 부친은 유사문(柳師文)이며, 외조부는 여창군(礪昌君) 이합(李柙)이다.
1777(정조 1)년 정유(丁酉)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1위로 장원(壯元) 급제하였다. 김창협(金昌協)의 손자로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절충적 입장인 낙론(洛論) 대표자 김원행(金元行)을 사사하였다.
관직으로 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다.
1792년(정조 16)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별시(別試)를 치룬 것에 대해, 왕이 경연에는 참석치 않고 유흥만 즐긴다며, 도산서원 별시에 대한 노론(老論)의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상소를 올려, 영남 선비들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리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로 인해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正祖)는 끝까지 벌을 주지 않았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11655])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11655])
[집필자]
박경이
명 : "성한(星漢)"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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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