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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운(李益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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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수(季受)
시호(諡號)정숙(靖肅)
생년1748(영조 24)
졸년1817(순조 17)
시대조선후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징대(李徵大)

[상세내용]

이익운(李益運)
1748년(영조 24)∼1817년(순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수(季受). 호는 학록(鶴麓). 이조판서 이징대(李徵大)의 아들이다. 채제공(蔡濟恭)의 문인이다.

1774년(영조 5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80년(정조 4) 정언(正言)이 되었다.

1782년 스승인 채제공을 위하여 신변(伸辨)을 하다가 이 때문에 파직을 당하고, 1794년 역인(逆䄄)의 죄를 논하다가 강화부(江華府)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죄가 용서되어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벽파(僻派)의 논척(論斥)으로 연석(筵席)에서 방자한 습성이 심하다고 하여 다시 흑산도에 유배가 결정되었다가 특별히 사면되기도 하였다.

그해 11월 정조가 영남 22읍에 견휼(蠲恤)의 윤음을 내릴 때, 경상도위유사(慶尙道慰諭使)가 되어 여러가지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801년(순조 1) 경기도관찰사 재직시에는 주문모(周文謨)와 관련된 천주교신자 18인을 잡아들여 심문한 뒤 그 중 3인을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그뒤 스승 채제공의 관작이 추탈되던 때에 이윤행(李允行)박명섭(朴命燮) 등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805년 직첩(職牒)을 다시 받아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2년 뒤 이시수(李時秀)의 추천으로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양하다가 1812년 반송사(伴送使)에 임명되었다.

1815년 대사헌 재직 때에는 성균관유생들에 의하여 당시 사학(邪學)을 비호하였다는 탄핵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도 유생 양규(梁珪)심의영(沈宜永)의 척사소(斥邪疏)에 걸려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벼슬은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1835년(헌종 2) 정숙(靖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日省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손승철(孫承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4-07채제공의 번암집을 참고하여 호 학록(鶴麓)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