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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李基讓)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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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흥(士興)
호(號)복암(伏菴)
생년1744(영조 20)
졸년1802(순조 2)
시대조선후기
본관광주(廣州)
활동분야학자 > 실학자

[상세내용]

이기양(李基讓)
1744년(영조 20)∼1802년(순조 2). 조선 후기의 실학자‧천주교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이덕형(李德馨)의 7대손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哲身)홍낙민(洪樂敏)과는 사돈간이 되며 교우가 두터웠다.

1774년(영조 50)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그뒤 현감까지 지내다가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이 되었고, 이어 검상승지를 역임하고 1798년 의주부윤으로 나갔다.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서 청나라에 가는 기회에 천주교 교리와 직접 접하게 되었고, 귀국하여 이가환이벽(李檗) 등과 함께 사귀었다. 이벽과는 세계와 우주의 기원과 그 질서, 인간영혼과 후세상벌에 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서학의 교리를 토론하였는데, 결국 이 토론에서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인정하였고 은밀히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겉으로는 남인공서파(南人攻西派)와 친분을 가짐으로써 서학 반대자로서 자처하였다. 이후 병조참판우승지한성부우윤을 거쳐 1801년(순조 1)에는 대사간예조참판좌승지를 역임하였다.

특히, 안정복(安鼎福)은 그가 천주학에 빠져 들어가자 장문의 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들 이총억(李寵億)이 신자였던 관계로 반대파들은 그를 이른바 사학(邪學)의 교주라고 비난하였고, 그 자신도 친국소에서 무답으로 응하였기 때문에 단천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신원, 복관되었다.

저서로는 『복암유고』가 있으며, 편서로는 『한음문고부록(漢陰文稿附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推案及鞫案
順菴集
闢衛編(李基慶)
Histoire de L’eglise de Coree(Dallet, C. C., Paris, 1874)

[집필자]

김옥희(金玉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