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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현(申應顯)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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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동보(同甫)
호(號)우헌(愚軒)
시호(諡號)충헌(忠憲)
생년1722(경종 2)
졸년1797(정조 21)
시대조선후기
본관평산(平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신수(申𢢝)

[상세내용]

신응현(申應顯)
1722년(경종 2)∼1797년(정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동보(同甫), 호는 우헌(愚軒).

부친은 필선 신수(申𢢝)이다.

1752년(영조 2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754년 검열을 거쳐, 1757년 장령이 되었다. 다음해 ‘학문을 권장할 것, 정사에 힘쓸 것, 언로를 개방할 것, 임금에게 버림받은 자들을 다시 부를 것’ 등의 시무책을 올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경상도 기장현(機張縣)으로 유배당하였다.

1760년 풀려나 1763년 장령, 다음해 헌납, 1766년에 사간이 되었다. 사간으로 있으면서 그는 1769년에 임금은 만기(萬機)를 두루 살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려 영조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뒤 집의사간부수찬을 지냈다. 집의로 있을 때 세손의 청정(聽政)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사간부호군경기수사 등을 역임하였다.

1777년(정조 1) 함경도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자 북관감진어사(北關監賑御史)로 임명되어 10개읍의 전세(田稅)를 탕감해주고 굶주린 백성 20여만명을 구휼하였다. 이 공로로 예조참의에 승진되었다.

그뒤 1778년 동부승지, 1781년 참찬관승정원우승지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고, 1791년 공조판서대사헌을 끝으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夢梧集
明義錄
國朝榜目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대표명신응현(申應顯)
성명신응현(申應顯), 신응현(申應显)

성명 : "신응현(申應顯)"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郯述v02申應顯
祔廟都監都廳儀軌房承旨 李普行加資入侍承旨鄭民始‧徐有防‧李鎭衡‧申應顯 各半 熟馬一匹賜給 典祀官正高益警 執禮副修撰金
祔廟都監都廳儀軌承旨洪 國榮‧承旨鄭民始‧徐有防‧李普行‧李鎭衡‧申應顯各熟馬一 匹賜給 史官柳孟養‧鄭東俊‧徐龍輔‧金勉
祔廟都監都廳儀軌承旨李普行 加資 入侍承旨鄭民始‧徐有防‧李鎭 衡申應顯 堂下執禮正南柱老 各室大祝正郞沈豐之‧副 司果李
上號都監儀軌林得浩‧李昌伋‧蔡弘履竝進曰 聖敎至當 更何異議 申應顯‧愼□復‧尹弼秉‧任希簡竝進曰 聖敎至當 無容更議
上號都監儀軌司果李啇巖副司果李坤副司果趙英鎭副司果李養遂副司果申應顯副司果徐有防副司果申大升弘文館修撰金漢老弘文館修撰
上號都監儀軌大殿讀玉冊官副司果朴相老捧玉冊官副司果李養遂副司果申應顯擧玉冊案者工曹佐郞金魯永軍資監直長趙基泓擧褥席官敦
東國續修文獻錄v1十五判書洪檍幼直南陽人八十八判樞鄭存謙見相七十三宋濟魯士賓礪山人八十四知敦徐秉德攸好連山人九十五判尹申應顯同甫平山人七十六工判邊得讓士謙黃州人七十九知事金尙集士能江陵人七十七兵判洪秀輔君擇豐山人七十八判敦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5-07정조실록 1799년 2월 5일조를 참고하여 시호 충헌(忠憲)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