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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인(金致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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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서(公恕)
호(號)고정(古亭)
시호(諡號)헌숙(憲肅)
생년1716(숙종 42)
졸년1790(정조 14)
시대조선후기
본관청풍(淸風)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재로(金在魯)
조부김구(金構)

[상세내용]

김치인(金致仁)
1716년(숙종 42)∼1790년(정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 우의정 김구(金構)의 손자이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아들이다.

1747년(영조 23)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하여 예문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문경어사(聞慶御史)문경현감의 탐욕을 복명하였다. 이어 지평과 문학을 거쳐 1750년에는 호남어사로 활약하였다.

1752년 승지에 오르고, 이어 대사간비변사부제조(備邊司副提調)대사성부제학이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지냈다.

1762년 이후 이조호조형조판서를 지냈으며, 1765년 우의정에 올라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그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영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영의정을 지냈다.

1772년 당파를 조성했다는 죄로 직산현(稷山縣)으로 유배되었으나, 반년 만에 풀려나 영중추부사로 다시 서용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판중추부사로 기용되어 고부 겸 승습주청사(告訃兼承襲奏請使)의 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다시 영부사(領府事)를 거쳐 봉조하가 되어 『명의록(明義錄)』 편찬을 주관하고, 1785년에는 『대전통편』 편찬을 주관했다.

이듬해 영의정으로 기용되어 정조의 명으로 당쟁의 조정에 힘썼다.

성품이 치밀하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로, 나라의 전고(典故)에 정통하여 이를 정사에 활용하는 데 능하였다.

편저로 『명의록』『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가 있다. 시호는 헌숙(憲肅)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