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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최중(李最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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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부(仁夫)
호(號)위암(韋菴)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715(숙종 41)
졸년1784(정조 8)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현응(李顯應)
저서『위암집』
저서『환범옹만록(換凡翁漫錄)』

[상세내용]

이최중(李最中)
1715년(숙종 41)∼1784년(정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인부(仁夫), 호는 위암(韋菴). 현감 이현응(李顯應)의 아들이다.

1744년(영조 20) 사마시에 오른 뒤, 175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세자시강원 사서홍문관교리수찬 등을 거치면서 1755년에 『천의소감(闡義昭鑑)』 편찬 때 찬집낭청(纂輯郞廳)의 일원으로 이에 참여하였다.

또, 이무렵 경연석상에서 수령 임용방안을 진언, 세력있는 자는 피폐한 고을(弊邑)에, 세력없는 자는 좋은 고을(好邑)에 임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여 왕으로부터 칭찬과 포상을 받았다.

1756년 강원도어사가 되어 그 지방의 부사현령 등의 치적을 자세히 살펴 보고하고 이어 이정어사(釐整御史)로 재파견, 그 지방의 제반폐해를 교정하고 돌아왔다.

훗날 삼척부사 재임시 올린 「진삼척민폐소(陳三陟民弊疏)」에서도,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의 어려움이 절정에 달하여 유망민이 속출하고 있음을 지적, 공물(貢物)과 환곡(還穀)의 징수는 현지실정에 맞추어 재조정할 것을 촉구하는 등, 특히 농민생활의 안정에 관심이 깊었다.

1757년 이후 홍문관응교삼척부사대사간이조참의부제학예조참판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770년 『문헌비고』 편찬 때 편집당상(編輯堂上)이 되었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노론으로 당쟁에 연루되어 함경도 갑산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함경도관찰사에 이어 우참찬을 끝으로 1773년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782년(정조 6) 이유백(李有白)의 대역부도죄 사건에 친척으로 연좌되어 영암 추자도에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다.

순조 때 신원되었으며, 저서에 『위암집』 6권 3책과 『환범옹만록(換凡翁漫錄)』 10책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