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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수(徐志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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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일지(一之)
호(號)졸옹(拙翁)
시호(諡號)문청(文淸)
생년1714(숙종 40)
졸년1768(영조 44)
시대조선후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서명균(徐命均)
청풍김씨(淸風金氏)
조부서종태(徐宗泰)

[상세내용]

서지수(徐志修)
1714년(숙종 40)∼1768년(영조 4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일지(一之), 호는 송옹(松翁) 또는 졸옹(拙翁).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의 아들이고, 모친은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1733년(영조 9) 진사가 되고,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제학대사헌이조판서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66년에는 영의정에 올라 할아버지 서종태(徐宗泰), 아버지 서명균에 이어 3대째 상신(相臣)이 되었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비행을 조작하여 영조에게 허위보고한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일당을 탄핵하였으며, 시강원(侍講院)빈객(賓客)으로 장헌세자를 교도하여 그 보호에 힘썼다.

장헌세자가 죽고 그의 아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정경(正卿)의 직위에 있으면서 동궁의 요속(僚屬)이 되어 보좌하였으며, 또 왕위에 오르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여 뒤에 정조의 추앙을 받았다.

천성이 청렴결백하여 세속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정조 때 청백리로 현창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영유(永柔)의 「제갈량묘악비문천상추배기사비(諸葛亮廟岳飛文天祥追配紀事碑)」와 양주(楊州)의 「풍덕부사서명무갈(豊德府使徐命茂碣)」을 썼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恩坡散稿
大邱徐氏世譜
領議政徐志修諡狀

[집필자]

정옥자(鄭玉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03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