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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기(鄭尙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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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일(汝逸)
호(號)농포자(農圃子)
생년1678(숙종 4)
졸년1752(영조 28)
시대조선중기
본관하동(河東)
활동분야학자 > 기타
저서『인자비감(人子備鑑)』
저서『농포문답(農圃問答)』
저서『심의설(深衣說)』
저서『도령편(鞱鈴篇)』
저서『향거요람(鄕居要覽)』
저서『치군요람(治郡要覽)』

[상세내용]

정상기(鄭尙驥)
1678년(숙종 4)∼1752년(영조 28). 조선 영조 때의 지리학자.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여일(汝逸), 호는 농포자(農圃子).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이며,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7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몸이 약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중년 이후에는 저작에 힘썼다.

연구분야는 치민(治民)‧치병(治兵)에 필요한 정치‧경제‧재정‧국방(병사)‧병술‧의약‧기계‧산업(농업) 등의 각 방면에 걸쳤고, 일상생활의 전반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다루었다.

아들 정항령(鄭恒齡)의 공으로 인하여 첨지중추부사에 제배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전국을 답사하여 역대 국경변천의 역사지리학적인 검토를 꾀하였다.

즉, 군현(郡縣)의 연혁, 산천도리(山川道里), 관방(關防)의 성곽, 해로(海路), 북간도강계(北間島疆界), 궁실(宮室) 등에 관한 역사적 변천을 밝혔다.

특히, 산천에 대하여서는 다분히 자연지리학적 관점에서 서술하였고, 정치적 관점을 벗어난 근대적인 관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도제작에 있어 과학적인 백리척(百里尺)을 이용한 축척법을 사용한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즉, 1척을 100리로, 1촌을 10리로 기준하여 계산한 축척법에 의거하여 세밀한 대축척 지도의 제작에 정확성을 높임으로써 크게 공헌하였다.

그가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에 대하여 이익『성호사설』에서 “정상기가 처음으로 백리척을 축척으로 써서 지도를 그렸고, 또 가장 정확하다.”고 찬탄하였다.

영조 때의 대지리학자인 신경준(申景濬)도 “척량촌탁(尺量寸度)에 의한 정밀한 지도는 정상기가 처음으로 만들었다.”(동국여지도 발문)고 하고, 정상기『동국지도』를 바탕으로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만들어 왕에게 바쳤음을 기록하고 있다(동국여지도 발문).

그의 지도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축척이 밝혀진 지도일 뿐만 아니라, 도별도를 이으면 전국도가 되도록 동일 축척에 의하여 고안, 표현되었다.

또, 수륙교통로와 통신망의 표현, 산맥의 보다 명확한 표현, 시각적 효과를 고려한 도별 채색 등은 특기할만한 것이다.

아들 항령 역시 지도 제작을 계승하여 수보윤색(修補潤色)하였고, 정항령의 아들 정원림(鄭元霖)정조 때 왕의 특명으로 『여지고(輿地考)』를 수보한 바 있어, 여러 대에 걸쳐 지도제작에 힘써 조선시대의 지도사상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주요저서로는 『인자비감(人子備鑑)』『농포문답(農圃問答)』『심의설(深衣說)』『도령편(鞱鈴篇)』『향거요람(鄕居要覽)』『치군요람(治郡要覽)』 등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星湖集
旅菴全書
左海輿圖
한국의 지도(方東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鄭尙驥와 東國地圖(李丙燾, 書誌 1―1, 1965)

[집필자]

한인수(韓仁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