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수(朴師洙)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C0ACC218B1686X0 |
호(號) | 내재(耐齋) |
시호(諡號) | 문헌(文憲) |
생년 | 1686(숙종 12) |
졸년 | 1739(영조 1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반남(潘南)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필명(朴弼明) |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사수(朴師洙)
1686년(숙종 12)∼1739년(영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내헌(耐軒)‧내재(耐齋). 대사헌 박필명(朴弼明)의 아들이다.
1714년(숙종 40) 생원으로 참봉이 되고,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727년(영조 3) 승지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그뒤 다시 대사헌‧영남안무사(嶺南安撫使)‧대사간을 거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는데, 이때 영조의 명을 받아 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신임사화의 전말을 밝힌 『감란록(勘亂錄)』 찬수의 명을 받았다.
그는 왕의 뜻에 따라 송인명과 함께 탕평책을 주도하여갔다. 뒤에 그는 당인이라고 하여 『감란록』 찬수의 일을 사직하고, 대신 조현명(趙顯命)을 중용할 것을 청하였다.
1731년 황해도관찰사 이후 평안도관찰사와 1738년 예문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우참찬으로 재직하던 중 죽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특히 죽화(竹畵)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714년(숙종 40) 생원으로 참봉이 되고,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727년(영조 3) 승지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그뒤 다시 대사헌‧영남안무사(嶺南安撫使)‧대사간을 거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는데, 이때 영조의 명을 받아 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신임사화의 전말을 밝힌 『감란록(勘亂錄)』 찬수의 명을 받았다.
그는 왕의 뜻에 따라 송인명과 함께 탕평책을 주도하여갔다. 뒤에 그는 당인이라고 하여 『감란록』 찬수의 일을 사직하고, 대신 조현명(趙顯命)을 중용할 것을 청하였다.
1731년 황해도관찰사 이후 평안도관찰사와 1738년 예문관제학을 거쳐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우참찬으로 재직하던 중 죽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특히 죽화(竹畵)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英祖實錄
[집필자]
유원동(劉元東)
명 : "사수(師洙)"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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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