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렴(吳尙濂)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24C0C1B834B1680X0 |
자(字) | 무숙(茂叔) |
호(號) | 연초재(燕超齋) |
호(號) | 택남(澤南) |
호(號) | 제월(霽月) |
생년 | 1680(숙종 6) |
졸년 | 1707(숙종 3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동복(同福)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오시적(吳始績) |
조부 | 오정벽(吳挺璧) |
외조부 | 윤매(尹梅) |
출신지 | 제천(堤川) |
[관련정보]
[상세내용]
오상렴(吳尙濂)
1680년(숙종 6)∼1707년(숙종 3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유청(幼淸)‧무숙(茂叔), 호는 연초재(燕超齋)‧택남(澤南)‧제월(霽月).
조부는 오정벽(吳挺璧)이고, 1680년(숙종 6) 9월 9일에 남인(南人)인 황주판관(黃州判官) 오시적(吳始績)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1660년(현종 1) 경자증광사마시(庚子增廣司馬試)에 진사 1등으로 합격한 윤매(尹梅)의 딸이다. 형은 오상함(吳尙涵)이고, 누이는 선조의 아들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현손인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에게 시집갔다.
그가 태어난 해인 1680년은 경신환국이 일어난 해로,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백부 오시수(吳始壽)가 사사당하는 화를 당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거의 모든 정치권력을 잃게 되는 정국 속에서 부친 오시적은 제천(堤川)으로 낙향하였고, 이때에 오상렴이 태어난 것이다.
오상렴은 병약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었으며, 1699년(숙종 25) 기묘증광사마시(己卯增廣司馬試)에 생원‧진사에 연달아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실패한 이후로 칩거하였다. 이때에 『장자(莊子)』, 불경까지 두루 섭렵하여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1704년(숙종 31) 25세에 김이만(金履萬)과 함께 시고(詩稿)를 들고, 경신환국 이후에 과천(果川)의 청계산 부근으로 퇴거한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의 거소로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오상렴은 송곡으로부터 신라의 최치원(崔致遠)과 고려의 이색(李穡)에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의고악부에 대해서는 전인의 미발처를 제작하였다는 추허를 입었다. 그는 1707년(숙종 33) 8월 21일 28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선배로는 정규상(鄭奎祥), 김봉지(金鳳至), 허규(許奎)를 추종하였고, 동년배로 김봉지의 아들인 김덕유(金德裕), 김이만(金履萬), 박성서(朴聖瑞), 이홍모(李弘模), 정홍유(鄭弘儒), 정범조(丁範祖), 유경종(柳慶種), 이익(李翼) 등과 교유하였다.
그의 문학은 근기(近畿)와 호서 일대의 남인 계열의 문인들에 의해 추켜졌는데, 그의 시학이 갖는 창작지향과 내용이 여러 문인들에게 동의와 수용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허목(許穆) 이래 남인 계열의 학풍인 고학(古學)에 뜻을 두고 학습과 창작을 전개한 바, 그의 독서 범위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국어(國語)』와 같은 고경(古經)을 섭렵하였고, 시에 있어서는 진한(秦漢)과 두보(杜甫)로 대표되는 성당(盛唐)에 지향점을 두고 있었다.
그의 시세계를 살펴보면, 초기의 작품들은 중국의 당송명(唐宋明)의 시인들의 작품을 두루 익히는 과정에서 출발하여 영사, 영물, 의고, 악부 등의 작시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며, 이후 두보를 배워 시어와 구법에서 두보시를 애독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한아한 정경을 드러내면서 삶의 지향성과 내면 의식이 녹아있는 작품군을 통하여 ‘표일(飄逸)’의 미적인 특징과 개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문학은 전대 학당(學唐)의 시인들의 풍모를 이으면서, 후대의 정범조, 신광수 등 당풍의 문학을 지향했던 남인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연초재유고(燕超齋遺稿)』라는 시문집을 남겼는데, 이 책은 1745년(영조 21)에 생질 이익정(李益炡)에 의해 간행되었다.
조부는 오정벽(吳挺璧)이고, 1680년(숙종 6) 9월 9일에 남인(南人)인 황주판관(黃州判官) 오시적(吳始績)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1660년(현종 1) 경자증광사마시(庚子增廣司馬試)에 진사 1등으로 합격한 윤매(尹梅)의 딸이다. 형은 오상함(吳尙涵)이고, 누이는 선조의 아들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현손인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에게 시집갔다.
그가 태어난 해인 1680년은 경신환국이 일어난 해로,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백부 오시수(吳始壽)가 사사당하는 화를 당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거의 모든 정치권력을 잃게 되는 정국 속에서 부친 오시적은 제천(堤川)으로 낙향하였고, 이때에 오상렴이 태어난 것이다.
오상렴은 병약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었으며, 1699년(숙종 25) 기묘증광사마시(己卯增廣司馬試)에 생원‧진사에 연달아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실패한 이후로 칩거하였다. 이때에 『장자(莊子)』, 불경까지 두루 섭렵하여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1704년(숙종 31) 25세에 김이만(金履萬)과 함께 시고(詩稿)를 들고, 경신환국 이후에 과천(果川)의 청계산 부근으로 퇴거한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의 거소로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오상렴은 송곡으로부터 신라의 최치원(崔致遠)과 고려의 이색(李穡)에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의고악부에 대해서는 전인의 미발처를 제작하였다는 추허를 입었다. 그는 1707년(숙종 33) 8월 21일 28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선배로는 정규상(鄭奎祥), 김봉지(金鳳至), 허규(許奎)를 추종하였고, 동년배로 김봉지의 아들인 김덕유(金德裕), 김이만(金履萬), 박성서(朴聖瑞), 이홍모(李弘模), 정홍유(鄭弘儒), 정범조(丁範祖), 유경종(柳慶種), 이익(李翼) 등과 교유하였다.
그의 문학은 근기(近畿)와 호서 일대의 남인 계열의 문인들에 의해 추켜졌는데, 그의 시학이 갖는 창작지향과 내용이 여러 문인들에게 동의와 수용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허목(許穆) 이래 남인 계열의 학풍인 고학(古學)에 뜻을 두고 학습과 창작을 전개한 바, 그의 독서 범위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국어(國語)』와 같은 고경(古經)을 섭렵하였고, 시에 있어서는 진한(秦漢)과 두보(杜甫)로 대표되는 성당(盛唐)에 지향점을 두고 있었다.
그의 시세계를 살펴보면, 초기의 작품들은 중국의 당송명(唐宋明)의 시인들의 작품을 두루 익히는 과정에서 출발하여 영사, 영물, 의고, 악부 등의 작시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며, 이후 두보를 배워 시어와 구법에서 두보시를 애독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한아한 정경을 드러내면서 삶의 지향성과 내면 의식이 녹아있는 작품군을 통하여 ‘표일(飄逸)’의 미적인 특징과 개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문학은 전대 학당(學唐)의 시인들의 풍모를 이으면서, 후대의 정범조, 신광수 등 당풍의 문학을 지향했던 남인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연초재유고(燕超齋遺稿)』라는 시문집을 남겼는데, 이 책은 1745년(영조 21)에 생질 이익정(李益炡)에 의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燕超齋遺稿
鶴皐先生文集
螢雪記聞陶谷集
三溟詩話
鶴皐先生文集
螢雪記聞陶谷集
三溟詩話
[집필자]
이관성
성명 : "오상렴(吳尙濂)"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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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