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항(吳命恒)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24BA85D56DB1673X0 |
자(字) | 사상(士常) |
호(號) | 영모당(永慕堂) |
시호(諡號) | 충효(忠孝) |
생년 | 1673(현종 14) |
졸년 | 1728(영조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해주(海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오수량(吳遂良) |
공신호 | 분무공신(奮武功臣) |
[상세내용]
오명항(吳命恒)
1673년(현종 14)∼1728년(영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상(士常), 호는 모암(慕菴)‧영모당(永慕堂).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의 현손이며, 부친은 오수량(吳遂良)이다.
1705년(숙종 3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09년 교리를 거쳐 설서‧사서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부수찬, 1713년에 겸필선(兼弼善), 1715년 부응교(副應敎)‧이조좌랑을 지냈다.
1716년 승지에 이어 경상도와 강원도‧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거쳐 사직으로 있다가 1724년(영조 즉위)에 소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지중추부사로 기용되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로 4도도순무사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었으나,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이라는 것을 자책하고 상소하여 사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1705년(숙종 3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09년 교리를 거쳐 설서‧사서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부수찬, 1713년에 겸필선(兼弼善), 1715년 부응교(副應敎)‧이조좌랑을 지냈다.
1716년 승지에 이어 경상도와 강원도‧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거쳐 사직으로 있다가 1724년(영조 즉위)에 소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지중추부사로 기용되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로 4도도순무사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었으나,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이라는 것을 자책하고 상소하여 사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歸鹿集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歸鹿集
[집필자]
정덕기(鄭德基)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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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