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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柳成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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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집중(集中)
호(號)묵수(黙守)
생년1651(효종 2)
졸년1710(숙종 36)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주(晉州[土])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연(柳莚)

[상세내용]

유성운(柳成運)
1651년(효종 2)∼1710년(숙종 3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土]). 자는 집중(集中), 호는 묵수(黙守).

세자시강원필선 유연(柳莚)의 아들이다.

윤증(尹拯)의 문인으로 1683년(숙종 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85년 승정원주서로 있을 때 윤선거(尹宣擧)윤증 부자의 무함을 변호하고 그들을 유신(儒臣)으로 존칭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송시열(宋時烈)일파의 노론에게 미움을 받았다.

1686년 병조좌랑을 거쳐 1688년 지평에 올라 노론의 중견 이조참판 이선(李選)을 탄핵하였다.

그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관직을 물러났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자 재등용되어 세자시강원문학제용감정(濟用監正)을 역임하였으나 집의 한성우(韓聖佑)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704년 3월 사직으로서 명나라의 멸망 1주갑(갑신)을 맞아 비운에 죽은 의종과 그 신하들을 위하여 단을 쌓고 추모 제사를 지낼 것을 건의하여 채택되었는데, 이것이 대보단(大報壇)설치의 계기가 되었다.

그해 6월에 불우하게 죽은 남효온(南孝溫)김시습(金時習)송상민(宋尙敏) 등을 포장할 것을 건의하여 일부 시행되었고 이어 세자시강원필선에 임명되었으나 노론의 방해로 취임하지 못하였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양사의 요직에 천거되었으나 견제를 받아 저지되었다. 그는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숙종의 인정을 받고 시강원의 요직에 발탁되기도 하였으나 당쟁에 휩쓸려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영춘(李迎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