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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두(鄭齊斗)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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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앙(士仰)
호(號)하곡(霞谷)
시호(諡號)문강(文康)
생년1649(인조 27)
졸년1736(영조 12)
시대조선중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학자 > 유생
정상징(鄭尙徵)
한산이씨(韓山李氏)
조부정유성(鄭維城)
외조부이기조(李基祚)
출생지서울
저서『학변(學辨)』
저서『존언(存言)』
저서『중용설』
저서『대학설』
저서『논어설』
저서『맹자설』
저서『삼경차록(三京箚錄)』
저서『경학집록』
저서『하락역상(河洛易象)』
저서『심경집의(心經集義)』
저서『정성서해(定性書解)』
저서『통서해(通書解)』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제두(鄭齊斗)
1649년(인조 27)∼1736년(영조 12). 조선 후기의 유학자‧양명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1. 가계 및 관력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정상징(鄭尙徵)의 아들이며, 모친은 한산이씨(韓山李氏)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이상익(李商翼)에게 수학하였다.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에 24세 때부터는 과거공부를 그만둔 다음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천거하여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그뒤 종부시주부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40세 때는 평택현감에 임명되고 그뒤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상령군수종부시주부사헌부장령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61세 때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옮겨 살았으며, 호조참의강원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74세에는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에 임명되고 그뒤 성균관좨주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78세 때는 이정박(李廷撲)이 조정에서 그가 양명학을 한다고 배척하였으나 영조의 보호를 받았으며, 80세에 의정부우참찬, 88세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임명되었다.
2. 학풍
20여세 때부터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기며 수학하였고,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으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하였다.

그는 당시에 주자학의 권위주의적 학풍에 대하여 학문적 진실성에서 비판하면서, “오늘날에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핑계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대는 데에서 나아가 곧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서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송시열(宋時烈)과의 서한을 통하여 경전의 뜻과 처신의 의리문제에 관한 논의를 펼치고 있으며, 스승 박세채를 비롯하여 윤증(尹拯)최석정(崔錫鼎)민이승(閔以升)박심(朴鐔) 등 스승과 벗들 사이의 왕복편지를 통하여 양명학의 문제를 토론하고 있다.

치양지설(致良知說)이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서 양명학의 견해를 받아들여서 『학변(學辨)』『존언(存言)』 등의 저술을 남겼다. 박세채는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여 그가 양명학을 버리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제두는 “왕씨(王守仁)의 학설에 애착을 가지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버리기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여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민이승과는 여러 차례 만나서 토론을 벌이거나 서한을 통하여 조목별로 심즉리(心卽理)‧치양지‧지행합일‧친민(親民) 등 양명학의 문제들에 관한 논란을 전개함으로써 양명학과 주자학의 두 견해의 본격적인 토론을 전개하였다.

민이승에게 왕수인의 글을 초록하여 제시하기도 하고,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와 「여명체용도(麗明體用圖)」를 그려서 양명학의 심성론 내지 양지론의 도상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왕수인의 심즉리설을 받아들여 주자의 마음〔心〕과 이(理)를 구별하는 견해를 비판한다. 마음과 이의 일치뿐만 아니라 이와 기(氣)의 이원화도 거부하고 이기합일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처럼 이가 마음과 일치되어 마음 밖에 이가 따로 존재할 수 없게 되기에 이가 공허하지 않고 실실이 있게 됨을 주장하였다.

양지의 개념에 대해서도 지각이나 지식의 뜻과 구별하여 성체(性體)의 지(知)요, 본연의 선(善)이며, 곧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의 지(知)임을 가리킨 것이라 하고 성의 본체라 한다.

「양지체용도」에서도 중심의 원 속에는 마음의 성과 인‧의‧예‧지와 마음의 본원과 양지의 본체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바깥의 가장 큰 원은 천지만물인 동시에 마음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였다.

심(心)‧성(性)‧정(情)의 관계도 성은 양지의 본체이고, 정은 양지의 작용이며, 마음은 바로 양지의 전체라 이해한다. 지행합일설에 대해서도 그는 지와 행을 둘로 나누어 놓는 것은 물욕에 가리워진 것이라 하고, 양지의 본체에서 보면 지와 행이 하나임을 지적한다.

그는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도 비판하면서 양명학의 확립에 전념하였다.
3. 저서
저술로는 『학변』『존언』 이외에도 『중용설』『대학설』『논어설』『맹자설』『삼경차록(三京箚錄)』『경학집록』『하락역상(河洛易象)』 등 경전주석이 있으며, 『심경집의(心經集義)』『정성서해(定性書解)』『통서해(通書解)』 등의 송대 도학자의 저술에 대한 주석도 하였다.

아들 후일(厚一)을 비롯하여 윤순(尹淳)이광사(李匡師)형제, 김택수(金澤秀) 등이 그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이었으며, 그가 속하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 채 계승되어갔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참고문헌]

霞谷集
陽明學演論(鄭寅普, 鄭寅普全集 2, 延世大學校出版部, 1983)
朝鮮時代의 陽明學硏究(尹南漢, 1982)
韓國의 陽明學(劉明鍾, 同和出版公社, 1983)
霞谷哲學의 陽明學的 理解(柳承國, 東洋哲學硏究, 垈域書齋, 1983)
陽明學의 傳來와 理解(李丙燾, 韓國儒學史, 亞細亞文化社, 1978)

[집필자]

김장태(琴章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