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이승(閔以升)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C774C2B9B1649X0 |
자(字) | 언휘(彦暉) |
호(號) | 성재(誠齋) |
생년 | 1649(인조 27) |
졸년 | 1698(숙종 2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상세내용]
민이승(閔以升)
1649년(인조 27)∼1698년(숙종 2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언휘(彦暉), 호는 성재(誠齋).
어려서부터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고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통독하면서 문장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윤증(尹拯)의 문하에 들어가 이미 그 능력을 인정받았고, 당대의 석학이던 김창협(金昌協)과 학문에 관한 토론을 벌이면서 그 명성을 떨쳤다.
1682년(숙종 8) 대신들의 천거로 창릉(昌陵)과 영릉(英陵)의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뒤에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제수되어 잠시 부임하였으나, 얼마 뒤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승진되자 다시 사양하고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고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통독하면서 문장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윤증(尹拯)의 문하에 들어가 이미 그 능력을 인정받았고, 당대의 석학이던 김창협(金昌協)과 학문에 관한 토론을 벌이면서 그 명성을 떨쳤다.
1682년(숙종 8) 대신들의 천거로 창릉(昌陵)과 영릉(英陵)의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뒤에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제수되어 잠시 부임하였으나, 얼마 뒤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승진되자 다시 사양하고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歸鹿集
歸鹿集
[집필자]
손승철(孫承喆)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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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