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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항(金宇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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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제중(濟仲)
호(號)좌은(坐隱)
시호(諡號)충정(忠靖)
생년1649(인조 27)
졸년1723(경종 3)
시대조선중기
본관김해(金海)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홍경(金洪慶)
저서『갑봉집(甲峰集)』

[상세내용]

김우항(金宇杭)
1649년(인조 27)∼1723년(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제중(濟仲), 호는 갑봉(甲峰)좌은(坐隱).

부친은 청송부사 김홍경(金洪慶)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 1675년(숙종 1) 유생들과 더불어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68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으며, 전적지평을 거쳐 1686년 정언이 되어 궁가(宮家)에서 저수지를 만든다는 구실로 민전(民田)을 침해하고 있음을 상소하였다.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역임하고, 1689년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였는데, 일찍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된 이상(李翔)을 변호했던 일로 철산(鐵山)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소론이 집권하자, 다시 기용되어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필선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696년 회양부사, 1697년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진정(賑政)을 잘하여 칭송을 받았다.

1698년 승지에 이어 1699년 대사간, 1702년 개성유수, 이듬해 승문원제조이조참판, 1704년 대사헌, 이어 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1706년에는 예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707년 한성부판윤이 된 뒤 형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1710년 호조판서가 되어 북한구관당상(北漢句管堂上)을 겸하며 산성의 축성과 행궁축조의 책임을 맡았다.

1712년 과옥(科獄)이 일어나자 소론으로서 자기의 당여를 두둔하지 않고 엄정하게 사실을 규명하여 소론으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우참찬예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716년 내의도제조(內醫都提調)판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721년(경종 1)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22년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이 화를 입자 이의 부당함을 극력 주장하였으며, 또 김일경(金一鏡)의 사친추존론(私親追尊論)을 반대하다가 화를 입었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으며 사람들로부터 장자(長子) 또는 완인(完人)이라 불렸다.

저서로 『갑봉집(甲峰集)』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國朝榜目
梅山集

[집필자]

신해순(申解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