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욱(李東郁){1}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B3D9C6B1B1646X0 |
자(字) | 자문(子文) |
호(號) | 한천(寒泉) |
생년 | 1646(인조 24) |
졸년 | 1708(숙종 3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여주(驪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훤(李烜)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동욱(李東郁)
1646년(인조 24)∼1708년(숙종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문(子文), 호는 한천(寒泉). 이훤(李烜)의 아들이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6년(숙종 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곧 문한관(文翰官)에 임명되었다.
1682년 지평에 승진하여 다음해 전라도선유어사(全羅道宣諭御使)가 되어 임진왜란 이래의 충신‧효자‧열녀를 찾아내어 조정에 보고, 포상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정언‧장령을 거쳐 1689년 종성부사가 되어 혜정(惠政)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비단을 하사받았다. 곧 경직(京職)에 돌아왔으나 기사환국으로 파직되어 산직(散職)에 머물다가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승지에 발탁되었으며, 다음해 병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696년 한성부우윤으로 직사를 잘못 처리하여 양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다음해에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외직에 나갔다가 귀경하였는데, 안주목사로 있을 때 백성들이 그의 생사당(生祠堂)을 만든 일로 인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706년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일찍이 풍덕(豊德)에 있는 흥교사 사적비(興敎寺事蹟碑)를 지었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6년(숙종 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곧 문한관(文翰官)에 임명되었다.
1682년 지평에 승진하여 다음해 전라도선유어사(全羅道宣諭御使)가 되어 임진왜란 이래의 충신‧효자‧열녀를 찾아내어 조정에 보고, 포상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정언‧장령을 거쳐 1689년 종성부사가 되어 혜정(惠政)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비단을 하사받았다. 곧 경직(京職)에 돌아왔으나 기사환국으로 파직되어 산직(散職)에 머물다가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승지에 발탁되었으며, 다음해 병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696년 한성부우윤으로 직사를 잘못 처리하여 양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다음해에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외직에 나갔다가 귀경하였는데, 안주목사로 있을 때 백성들이 그의 생사당(生祠堂)을 만든 일로 인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706년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일찍이 풍덕(豊德)에 있는 흥교사 사적비(興敎寺事蹟碑)를 지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朝鮮金石總覽
國朝榜目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명 : "동욱(東郁)"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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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