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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치훈(南致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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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훈연(熏然)
호(號)지산(芝山)
생년1645(인조 23)
졸년1716(숙종 42)
시대조선중기
본관의령(宜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남선(南翧)

[상세내용]

남치훈(南致熏)
1645년(인조 23)∼1716년(숙종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훈연(熏然), 호는 지산(芝山).

부친은 남선(南翧)이다.

1678년 선교랑(宣敎郞)의 신분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이듬해 검열이 되고 1681년 홍문록에 올랐다.

삼사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698년 승지를 거쳐 1707년 도승지가 되었고, 사은부사청나라에 다녀왔다.

1712년 형조참판으로 승진하여 형제가 형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713년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는 원자정호문제(元子定號問題)로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평탄한 길을 걸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유영박(柳永博)

명 : "치훈(致熏)"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寒臯觀外史v56疇錫字叙九恩津人官校理尤翁之孫也致熏字熏然號芝山宜寧人官吏參
大事編年v18微事尙然大事可知時烈爲山林領袖而其言如此風浪之起自可推知而若言其分義則拯爲寒心矣玄紀曰聖慮所及深遠矣致熏曰可見聖慮之所及矣益壽曰兩臣相達如此此則不然矣元子誕生之辰人情已有所恃況今名位已定分義至嚴苟非悖逆之
大事編年v18而以其妻死之故丁丑以後杜門讀書終不干預於世事其所樹立可想其堅確矣此豈失身忘義之人乎時烈疏詰甚爲不是矣致熏曰此事則臣於平日素慨惋者也以不過微細私事有何關繫國家之事而敢以煩亂私事每每猥瀆於章奏之間乎上曰四五年
大事編年v18玄紀曰今日宗社大計已定之後一國臣民懽忭之忱孰有異同而至於太早之意則臣實未知其何謂也上曰玉堂何無一言耶致熏曰臣與玄紀一般何異議於今日乎益壽曰一自元子定號之後臣民莫不歡悅雖不敢卽爲獻賀而人心固有所恃矣分義已定
大事編年v18何心歟然則欲使予待十年耶爾等其言之僉曰宗社大計一日爲急何可待十年乎上出示疏本於玉堂之臣見之後進達可也致熏曰伏見此疏則所謂嫌逼之慮云者似有太早之意也上曰玉堂乃公議之地而下番無一言何耶益壽曰急遽披見未閱首尾而
大事編年v18致熏曰宋時烈老昏語不成說矣玄紀曰此妄發矣雖有太早之意至於名位已定之後擧國臣民莫不懽忭鼓舞此言奚爲而哉致熏曰太早之意則隱然有之而老昏之臣至於被罪則未知如何彬曰以三朝禮遇之臣一朝被罪則未知何如矣上曰今後若有爲
大事編年v18雖以尹拯微細之事作一大風浪至於今日此擧則豈無大段節次乎將必有大段事矣彬曰宗社大計已定之後孰敢有異議乎致熏曰宋時烈老昏語不成說矣玄紀曰此妄發矣雖有太早之意至於名位已定之後擧國臣民莫不懽忭鼓舞此言奚爲而哉致熏
大事編年v18知何如矣上曰今後若有爲時烈呈疏紛紜之擧則將至於邪說橫流將啓無窮之患雖大臣決不饒貸此等疏章政院勿爲捧入致熏曰益壽事殿下平心恕究還收遞差之命幸甚上曰如此之故柳緯漢之疏闖發矣不藝之突豈生煙乎上曰尹拯之事極爲細微
大事編年v18文字間詬辱其父則爲其子者何可晏然於心乎極未嘗一出其爲人之如何則雖未可知而至於此事自有一世之公論是非矣致熏曰削逸之後無伸白之擧而每以此事屢煩疏章此豈國家所共之事乎且拯使其門徒緘口不欲與之相較云矣上曰微事尙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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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