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박진규(朴鎭圭)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C15C9C4ADDCB1633X0
자(字)정경(定卿)
생년1633(인조 11)
졸년1692(숙종 18)
시대조선중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계영(朴啓榮)
외조부유명남(柳命男)

[상세내용]

박진규(朴鎭圭)
1633년(인조 11)∼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정경(定卿). 첨지중추부사 박계영(朴啓榮)의 아들이며, 모친은 유명남(柳命男)의 딸이다.

통덕랑(通德郞)의 신분으로 1674년(숙종 즉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76년 정언(正言)이 되었고 1678년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헌납(獻納)이 되고, 그 이듬해 집의(執義)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는 위와 같은 언관직에 반복하여 임명되면서, 효종에 대한 예론(禮論)을 그르친 것으로 처분된 송시열(宋時烈)의 죄상을 종묘에 고하자고 대사간(大司諫) 이원정(李元禎)과 함께 주장하는 등, 남인의 입장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1678년 암행어사로 지방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당시 대사간 민암(閔黯)과 함께 사간직에서 체차당한 뒤 관직에 오르지 못하다가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西人)이 몰락하고 남인(南人)이 등용될 때 집의로 복귀하였다.

같은해 특별히 승지로 발탁되어 1691년까지 여러 차례 승지를 역임하였으며, 당시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에서 출향한 것을 비난하는 서인 유생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정치활동을 하였다.

1690년에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淸選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오수창(吳洙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