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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화(李世華)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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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군실(君實)
호(號)칠정(七井)
시호(諡號)충숙(忠肅)
생년1630(인조 8)
졸년1701(숙종 27)
시대조선중기
본관부평(富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희재(李熙載)
생부이이재(李以載)
증조부이계록(李繼祿)
저서『쌍백당집』

[상세내용]

이세화(李世華)
1630년(인조 8)∼1701년(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栢堂)칠정(七井).

병조정랑 이계록(李繼祿)의 증손으로, 이이재(李以載)의 아들이다. 큰아버지 이희재(李熙載)의 양자로 들어갔다.

1651년(효종 2) 상상(上庠: 진사를 가리킴.)에 올랐으며, 165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정언장령 등을 거쳐 황해도평안도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689년(숙종 15)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서호(西湖)의 향리로 돌아갔다. 그해 인현왕후(仁顯王后)폐비설을 듣고 반대소를 올렸다. 소에 판서 오두인(吳斗寅)과 그의 이름이 전면에 올라 있는지라, 숙종은 분노하여 밤중에 친국하였다.

그는 국문에서 “국사로 인해 죽기를 원했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하고, “다만, 신의 죽음이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우며, 신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옥리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을 밤새도록 친국하니 옥체를 상할까 두렵다.”고 형간(刑諫)하였다.

다음날 정주로 유배가다 풀려나와 파산(坡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갑술환국 후 1694년 4월 대사간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인현왕후복위도감제조로 차정한다는 말을 듣고 곧 상경하였다.

그뒤 의금부사 겸 지경연사세자빈객에 오르고,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그뒤 공조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저서로는 『쌍백당집』이 있다. 풍계(豊溪)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芝陽漫錄
雙栢堂集

[집필자]

정중환(丁仲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