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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李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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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우(季羽)
호(號)농재(農齋)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629(인조 7)
졸년1690(숙종 16)
시대조선중기
본관우봉(牛峰)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유겸(李有謙)

[상세내용]

이익(李翊)
1629년(인조 7)∼1690년(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우(季羽), 호는 농재(農齋).

호조참의 이유겸(李有謙)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52년(효종 3)에 진사가 되고, 1657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세자시강원설서사서를 거쳐 1659년 정언이 되어 대신이 술을 마시고 실태하는 것을 논박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사간(司諫)이 되어 송시열을 무고하는 영남유생 유세철(柳世哲) 등을 탄핵하였다.

그뒤 동부승지대사간이조참의원양도관찰사(原襄道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1674년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유배되면서 같은 서인으로 지탄을 받다가 1679년 양덕(陽德)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동부승지에 보직되고, 이어 대사헌홍문관부제학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682년 형조‧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하고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사직하자 함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뒤 다시 광화부유수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1688년에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광주부유수가 되어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기사환국 등으로 민암(閔黯)이 정권을 잡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그도 장흥부(長興府)로 귀양가서 배소에서 죽었다.

신의가 있고 높은 지조에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다. 『수교집록(受敎輯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江漢集

[이미지]

[집필자]

정중환(丁仲煥)
대표명이익(李翊)
성명이익(李翊)
시호문정(文貞)
계우(季羽)
농재(農齋)

자 : "계우(季羽)"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6李翊䎘弟仁祖己巳生字季羽號農齋孝宗壬辰進士丁酉登謁聖官止吏判善農故以農為號世穪翊為西神農金昌業為東神農宋時烈之乞骸也翊上䟽勉
俟百錄v2大矣論其孰先則余爲之最論其最深則吉甫似當難辭而先峯亦豈曰我則不然也噫九原雖不可作而後死者從此知戒可矣季羽旣去亟取筆以記之適答老峯書因竝附送爲
俟百錄v2崇禎丙辰十一月初九日李翊季羽來自晉州夜話從容季羽言得見崔翰林錫昇則曰吾常以翰林入侍經筵方以論語進講至管仲不死子糾章集註王珪魏徵事尹鐫曰王魏之事太宗義
俟百錄v2以論語進講至管仲不死子糾章集註王珪魏徵事尹鐫曰王魏之事太宗義也太宗旣爲天下之義主則王魏無不可事之理也季羽旣傳此崔說而曰以如此悖謬之見行之又無忌憚國事將如何也余隱之於曰噫人臣背君事讐之說將行於世而不可過也其
俟百錄v2崇禎丙辰十一月初九日李翊季羽來自晉州夜話從容季羽言得見崔翰林錫昇則曰吾常以翰林入侍經筵方以論語進講至管仲不死子糾章集註王珪魏徵事
國朝人物志v3人忠獻公䎘弟受業于愼獨齋金集以遺逸官至大司憲己巳因淫獄被禍東野粹言弟翊字季羽孝宗丁酉文科吏曹(參)判己巳被竄諡文貞國朝榜目上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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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