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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흥(金壽興)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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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기지(起之)
호(號)퇴우당(退憂堂)
호(號)동곽산인(東郭散人)
시호(諡號)문익(文翼)
생년1626(인조 4)
졸년1690(숙종 16)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광혁(金光爀)
생부김광찬(金光燦)
외조부김존경(金存敬)
저서『퇴우당집』

[상세내용]

김수흥(金壽興)
1626년(인조 4)∼1690년(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또는 동곽산인(東郭散人).

생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 양부는 동부승지(同副承旨) 김광혁(金光爀)이고, 양모는 광산김씨동지중추부사 김존경(金存敬)의 딸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형이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중시에 역시 병과로 급제한 뒤 부교리대사간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1666년(현종 7)에 호조판서, 1673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남인에게 몰려 부처될뻔하였고, 그해 8월 현종이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양주로 물러가 살았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어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장기(長鬐)에 유배되어 이듬해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송시열(宋時烈)을 마음의 스승으로 존경하여 그의 뜻에 따랐고, 『주자대전(朱子大全)』『어류(語類)』 등을 탐독하였다. 역대의 왕에게 시폐소(時弊疏)를 올려 백성의 편에서 정치하기를 힘쓰고 정치의 혁신을 여러 번 건의했다.

저서로는 『퇴우당집』 5책이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宋子大全
退憂堂集
陶庵集

[집필자]

양홍렬(梁鴻烈)

성명 : "김수흥(金夀興)"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6庶子之說實倡時烈是以先王以為㤀先王附托他論又曰阿附前後之論白日當空魑魅莫逃罪之首従於是乎判矣附邪論之金夀興猶被編配倡邪論之宋時烈豈漏憲章乎一正㓛服之失而壊禮亂統之罪時烈自不能辭矣時烈孝廟之罪人也先王之罪人也
紀年便攷v26莫重之禮决不可以附托之論㫁為定制依當初磨錬朞年之制定行○命服制付標之禮曹判書趙珩以下并拿鞫定罪領議政金夀興中道春川付䖏下教曰初喪時服制以朞年定奪誠為允合矣遽動浮言不請議䖏直為付標內惵衆庶大功之意曚矓磨錬厥罪
紀年便攷v26為付標內惵衆庶大功之意曚矓磨錬厥罪難逃其時禮曺判書趙珩參判金益炅參議洪柱國正卽任以道并拿鞫定罪領議政金夀興敢以無倫之說倡言軆而不正其㤀先王附他論之罪不可不正中道付䖏臺諌李光迪柳之發等請遝収大臣付䖏禮官拿鞫之
紀年便攷v26金夀興
紀年便攷v26金夀興以光燦子為伯父光爀后夀増弟金球外孫本生仁祖丙寅生字起之號退憂堂戊子進士為顯宗入學将命孝宗乙未登庭試丙
紀年便攷v26金夀興
紀年便攷v26金夀興見相臣
紀年便攷v26成宗子忱六世孫執義齊衡子仁祖乙丑生字有初號雙壺堂孝宗庚寅生貟顯宗庚子登増廣歴兩司以臺諌多抗論以承旨救金夀興被削黜屡除州郡四拜藩任或赴或不赴有氷蘗之操廷臣以文武才薦拜北兵使南九萬奏以清白苦節冝有賙恤肅宗辛未卒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