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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문(王以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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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왕봉강(王鳳崗)
자(字)기양(岐陽)
생년1625(인조 3)
졸년1699(숙종 25)
시대조선중기
본관제남(濟南)
활동분야귀화‧유민 > 귀화인
왕집(王輯)

[상세내용]

왕이문(王以文)
1625년(인조 3)∼1699년(숙종 25). 조선 중기의 유신(遺臣). 본관은 제남(濟南). 자는 기양(岐陽).

부친은 명나라 의종 때의 명신인 왕집(王輯)이다. 왕이문(王以文)중국 제남부(濟南府) 장구현(章丘縣)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왕봉강(王鳳崗)이었다. 조선으로 망명한 후 효종왕이문(王以文)이란 이름을 지어주었고, 본관도 산동(山東)이었으나 후손들이 왕이문의 관향이 제남(濟南)인 점을 고려하여 제남(濟南)로 고쳐 그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왕이문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빛났으며 예의가 밝아 향리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나이가 12세가 되던 1636년 2월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당시 청나라 병사들이 동리에 침입하여 장사를 지낼 수 없어서 외할아버지의 별장 후원에 폄장(窆葬)하였다. 또한 예로부터 사용하던 고기(古器)와 가첩이 모두 소실되었다.

가족을 이끌고 섬으로 피난 갔는데 그곳마저 함락되어 모든 가족이 붙잡혔다. 적들은 그가 어리면서도 씩씩함을 보고 기특히 여겨 진중에 두고서 감언이설로 항복을 유도하였지만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 해 9월 부인과 함께 심양관(瀋陽館)으로 호송되어 억류되었다.

당시 심양에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청에 볼모로 잡혀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 일행이 억류되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봉림대군과 교분을 가졌는데,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다른 산동(山東) 출신의 왕문상(王文祥)풍삼사(馮三士)유허롱(柳許弄)왕미승(王美承), 대동(大同) 출신인 유자성(劉自成)배성삼(裵成三)항주(杭州) 출신인 황공(黃功) 등과 더불어 따라 왔다.

효종은 그들을 본궁(本宮) 곁에 살게 하고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거절하면서 명나라가 회복되는 날을 기다려 돌아가겠다고 했다. 효종께서도 강권하지 않고 궁에 머물게 하고서 의식(衣食)을 제공하도록 했다가 나중에는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소속시켰다.

1704년(숙종 30)에 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을 제사하는 사당인 대보단(大報壇)을 창덕궁(昌德宮)에 설치할 적에 명나라 유민(遺民)의 후예로 영역장(領役將)을 삼도록 명했는데, 여기에 왕이문의 손자가 수임(首任)이 되었다. 또 영조 때에도 왕이문의 손자인 왕한정(王漢禎)별군직(別軍職)에 임명했으며 또 정조 때에는 기사장(騎士將)을 제수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肅宗實錄
韓國民族文化大辭典
南楊州市誌

[집필자]

김영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