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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재(權大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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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거(仲車)
호(號)소천(蘇川)
생년1620(광해군 12)
졸년1689(숙종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권위중(權偉中)
조부권협(權悏)
저서『독역수차(讀易手箚)』
저서『중용변의(中庸辨疑)』
저서『사림평요(士林評要)』
저서『남위록(南爲錄)』
저서『광산록(光山錄)』
저서『용문록(龍門錄)』
저서『초산록(草山錄)』

[상세내용]

권대재(權大載)
1620년(광해군 12)∼1689년(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 예조판서 권협(權悏)의 손자이고, 진사 권위중(權偉中)의 아들이다.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었다.

1658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에 승진되었고, 병조좌랑창평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전라도도사로 있을 때 과거시관으로서 물의를 일으켜 파직되었고, 1666년 공산판관(公山判官)때에는 소송자를 함부로 죽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서 남인으로 처신하였기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의 관직생활도 평탄하지가 않았다. 두 차례의 예송(禮訟)을 거친 뒤 남인이 정권을 잡자, 승지영남순무사대사간대사헌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면서, 송시열(宋時烈)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였다.

남인이 허목(許穆)을 중심으로 하는 청남(淸南)과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청남에서 활동하였고, 1679년 청남이 정권에서 물러나면서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쫓겨났다. 그해 10월에 전라감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경신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정권을 잡자 영변(寧邊)으로 유배되었다.

그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잡자 홍문관제학으로 등용되었다. 같은해에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주전(鑄錢)을 반대하였고, 송시열김수항(金壽恒)을 죽일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독역수차(讀易手箚)』『중용변의(中庸辨疑)』『사림평요(士林評要)』『남위록(南爲錄)』『광산록(光山錄)』『용문록(龍門錄)』『초산록(草山錄)』 등이 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玉川集

[집필자]

김동수(金東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