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익훈(金益勳)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C775D6C8B1619X0
자(字)무숙(懋叔)
호(號)광남(光南)
시호(諡號)충헌(忠獻)
생년1619(광해군 11)
졸년1689(숙종 15)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반(金槃)
조부김장생(金長生)
외조부김진려(金進礪)
공신호보사공신(保社功臣)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익훈(金益勳)
1619년(광해군 11)∼1689년(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무숙(懋叔), 호는 광남(光南).

조부는 산림(山林) 김장생(金長生), 부친은 참판 김반(金槃)이다. 김반은 부인을 둘 두었는데, 첫 부인은 첨추(僉樞) 김진려(金進礪)의 딸이며, 둘째 부인은 참판 서주의 딸인데, 둘째 부인이 김익훈을 낳았다.

음보로 등용되어 의금부도사남원부사사복시첨정 등을 역임하고, 1667년(현종 8) 사도시정이 되었다. 조카인 김만기(金萬基)의 딸이 숙종비로서, 숙종이 즉위한 뒤 어영대장 등 군권(軍權)의 요직을 지내면서 권력을 누렸다.

1680년(숙종 6) 김석주(金錫胄)의 주도로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조정에서 남인들을 숙청하는 데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2등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다. 이후 숙종의 깊은 신임에 힘입어 광주부윤좌윤형조참판어영대장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는 특히 김석주 등과 함께 훈척의 세력으로서, 송시열(宋時烈) 등과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1689년 어영대장 재직중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공신호를 빼앗기고 강계에 유배되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죄명으로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죽었다.

일찍부터 성품과 행실이 방자하며 부정축재를 많이 한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특히 1682년 남인 허새(許璽)의 모역사건 당시의 떳떳하지 못한 행동은 서인 내부 소장파의 반감을 부채질하여, 훈척과 서인 노장과의 협력에 소장세력이 크게 대립하고, 결국 노론과 소론이 분기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燃藜室記述
淸選考
黨議通略

[집필자]

김일기(金馹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9-22서주의 딸을 김익훈의 생모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