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응(鄭道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B3C4C751B1618X0 |
자(字) | 봉휘(鳳輝) |
호(號) | 무첨(無忝) |
생년 | 1618(광해군 10) |
졸년 | 1667(현종 8)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진양(晉陽)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정심(鄭杺) |
조부 | 정경세(鄭經世) |
저서 | 『국조명신록』 |
저서 | 『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 |
저서 | 『소대수언(昭代粹言)』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도응(鄭道應)
1618년(광해군 10)∼1667년(현종 8).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봉휘(鳳輝), 호는 무첨(無忝).
판서 정경세(鄭經世)의 손자로, 정심(鄭杺)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연소하나 사행(士行)이 있다고 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곧 교관(敎官)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 학행(學行)을 포상하여 자의(諮議)에 임명하였으나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657년(효종 8) 다시 자의에 임명되어 1년간 서울에 머무르다 사직하였다.
저서로는 『국조명신록』‧『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소대수언(昭代粹言)』 등이 있다.
판서 정경세(鄭經世)의 손자로, 정심(鄭杺)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연소하나 사행(士行)이 있다고 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곧 교관(敎官)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 학행(學行)을 포상하여 자의(諮議)에 임명하였으나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657년(효종 8) 다시 자의에 임명되어 1년간 서울에 머무르다 사직하였다.
저서로는 『국조명신록』‧『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소대수언(昭代粹言)』 등이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嶺南人物考
尙州邑誌
孝宗實錄
嶺南人物考
尙州邑誌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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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