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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기(趙嗣基)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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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지(敬止)
생년1617(광해군 9)
졸년1694(숙종 20)
시대조선중기
본관한양(漢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빈(趙贇)

[상세내용]

조사기(趙嗣基)
1617년(광해군 9)∼1694년(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지(敬止). 조빈(趙贇)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에 피임되고, 이어 사간원정언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아버지 조빈과 더불어 『인조실록』 찬수에 관여하였다.

1652년(효종 3) 사관(史官)으로서 시정기(時政記)의 편수를 태만히 하여 하옥되었다.

3년 후 경기도사로 있을 때 무부(武夫)의 말을 탈취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661년(현종 2) 개성경력(開城經歷)으로 재직중에 노비를 불법으로 9개월 감금하여 자살하게 한 죄로 사헌부로부터 파직의 탄핵을 받았다.

1672년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있을 때 효종의 복상(服喪)이 잘못되었음을 공박하고 이이(李珥)성혼(成渾)을 종사(從祀)할 것을 촉구하는 소를 올린 것 등이 물의를 일으켜, 이것이 당시의 당론(黨論)과 연계되어 의금부로부터 3년 도형(徒刑)의 형에 처하여졌으나 현종이 그를 파직시켰다.

1675년(숙종 1) 사헌부장령을 거쳐 승정원부승지에 승임되었다.

1678년 오위부호군에 서임되었는데 근년의 한재가 대례(大禮)을 치른 다음 고묘(告廟)하지 않아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송시열(宋時烈)을 공격한 일로 인하여 물의가 비등하여 1680년 귀양보내졌으며, 극처로 이배되어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1694년 왕은 선후(先后)를 무욕(誣辱)하는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하여 12차에 걸친 엄한 형신(刑訊)에도 불복하여 그를 참(斬)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