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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겸(金益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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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남(汝南)
시호(諡號)충정(忠正)
생년1614(광해군 6)
졸년1636(인조 14)
시대조선중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반(金槃)
조부김장생(金長生)

[상세내용]

김익겸(金益兼)
1614년(광해군 6)∼1636년(인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남(汝南).

조부는 김장생(金長生)이고, 부친은 참판 김반(金槃)이며, 모친은 서씨이다. 김익희(金益熙)의 아우이다.

1635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36년 후금태종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춘신사(春信使)로 파견된 나덕헌(羅德憲)이곽(李廓) 등이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함께 귀국하자,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청나라의 경축행사에 참가한 사신과 용골대의 주살(誅殺)을 주장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청나라의 사신이 급히 서둘러 돌아갔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가서 섬을 사수하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고 고전을 하는 중에 강화유도대장(江華留都大將)김상용(金尙容)이 남문에 화약궤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자분(自焚)하려고 하였다. 이에 영의정을 지냈던 윤방(尹昉)이 이 사실을 알고 달려와서 애써 만류하였으나, 김상용권순장(權順長)과 함께 끝내 자분하고 말았다.

이때 강화에서 순절한 사람은 모두 30명이 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丙子錄

[집필자]

유영박(柳永博)

성명 : "김익겸(金益謙)"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