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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국사(宋國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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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일경(一卿)
호(號)계담(桂潭)
생년1612(광해군 4)
졸년1690(숙종 16)
시대조선중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희진(宋希進)
조부송남수(宋枏壽)
묘소공주(公州) 사한리(沙寒里: 현재 대전시 동구 이사동)

[상세내용]

송국사(宋國士)
1612년(광해군 4)∼1690년(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일경(一卿), 호는 계담(桂潭).

조부는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송담(松潭) 송남수(宋枏壽)이고, 부친은 예조좌랑(禮曹左郞)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낸 송희진(宋希進)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교유하였다.

45세가 되던 1651년(효종 3) 6월 특별히 천거되어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직첩(職牒)에 청(淸)의 연호가 쓰였다고 하여 사직서를 내고 벼슬을 받지 않았다. 그 뒤 1665년(현종 6) 12월 다시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이 역시 받지 않았다.

1666년(현종 7) 우암동춘당의 권면으로 그해 4월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로 관직에 나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헌부감찰 겸 전중어사(司憲府監察兼殿中御使)로 전임되었다. 전중어사로 능력을 인정받아, 3년간 직을 수행했다.

1668년 이른바 칠문사건(漆門事件)으로 고창현감(高敞縣監)으로 나갔다. 현감으로 부임하여 1669년(현종 10) 동헌(東軒) 옆에 별당(別堂)인 평근당(平近堂)을 세웠는데, 그에 대한 내역과 선정에 대한 내용이 송시열이 지은 「평근당기(平近堂記)」에 기록되어 있다.

1671년(현종 12)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다시 감찰(監察)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귀양에 처해지고, 송준길 마저 관작이 추탈되자 분을 이기지 못해, 문을 닫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으려 하였다. 1677년(숙종 3)에는 제월당(霽月堂) 송규렴(宋奎廉)으로 하여금 송시열송준길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기도 하였다.

1690년(숙종 16) 5월 24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공주(公州) 사한리(沙寒里: 현재 대전시 동구 이사동)에 묻혔다. 1737년(영조 13) 통훈대부(通訓大夫)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춘추관기주관(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紀註官)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한밭人物誌

[집필자]

고윤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