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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昭顯世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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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조()
생년1612(광해군 4)
졸년1645(인조 23)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자
인조(仁祖)
인열왕후(仁烈王后)
민회빈(愍懷嬪)
처부강석기(姜碩期)
외조부한준겸(韓浚謙)
묘소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상세내용]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광해군 4)∼1645년(인조 23). 인조의 맏아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조(李). 모친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인조 3)에 세자에 책봉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그해에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과 혼인하였다. 이원익(李元翼)장유(張維) 등을 빈사(賓師: 세자시강원의 1품관)로 맞아 왕자의 덕을 닦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겨 청나라에 항전하려 하였으나, 청군의 빠른 남하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 3월과 1644년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의 그는 단순한 질자(質子)가 아니라 대사(大使) 이상의 외교관 소임을 하였다. 청나라조선에 대하여 무리한 물자를 요구하면 그를 막으려 노력도 하였다. 청나라조선과의 일을 인조가 병중이라서 담판할 수 없다 하여 세자의 재량으로 처리하도록 강요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세자는 본국에서는 무력한 존재이나, 심양관에서는 조청(朝淸)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격이 되었다.

그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644년 9월에 그는 청군을 따라 북경(北京)에 들어가 70여일을 머물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 J. A., 일명 湯若望)과의 친교로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전래함으로써 서양문물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하여 문화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집권이 되면서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듯하다.

특히, 소현세자는 300명이 넘는 시강원 관원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에 영합하면서 막대한 경비만을 국고에 부담지웠고 때로는 사무역(私貿易)을 자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세자의 행위는 인조에게 친청적인 인물로 보였으며, 조선 국왕의 후계자로서 부적격하다고 간주된 듯하다.

그 위에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하였으니 심양관에서 세자의 과도한 영리추구는 잠도역위(潛圖易位: 세자가 인조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공작) 또는 세자를 대신하여 인조를 청에 입조시키려는 공작이라고 모함하였다.

그리하여 인조는 심양관에 밀정을 보내어 세자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세자는 9년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환영보다는 냉대였으며, 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도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세자일행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문물에 관한 서적과 물자도 인조의 노여움을 가중시켰다.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그해 4월 23일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26일에 급서하였다.

이와같은 세자의 급서는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책임이라 하여 엄벌을 요구하였다. 이형익조소용의 외가와 관련된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된 의관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은 가운데 입회인을 제한하여 입관을 서둘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은연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그 하수인으로 이형익을 지목하고 있는 느낌을 주게 한다.

그뒤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민회빈은 물론 두 아들과 그의 친정식구, 그리고 세자빈과 친했던 많은 궁녀들이 죽음을 당한 것을 볼 때 살세자(殺世子)의 장본인은 바로 인조일 가능성이 높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하였으나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瀋陽狀啓
瀋陽日記
昭顯世子硏究(金龍德, 朝鮮後期思想史硏究, 乙酉文化社, 1977)
朝鮮西學史硏究(李元淳, 一志社, 1986)
昭顯世子と湯若望―朝鮮基督敎史硏究 其四―(山口正之, 靑丘學叢 5, 1931)
瀋陽考(田川孝三, 小田頌壽記念 朝鮮史論集, 1934)

[집필자]

김용덕(金龍德)
대표명소현세자(昭顯世子)
봉호소현(昭顯), 소현세자(昭顯世子)
시호소현세자(昭顯世子)

봉호 : "소현세자(昭顯世子)"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4昭顯世子諱仁烈王后誕生光海君王子誕降○仁祖乙丑冊封王世子入學丁丑以質子入瀋陽乙酉東還尋薨逝壽三十四生三男三女
羹墻錄v1綾原大君俌友愛隆洽念其經亂無宅特賜梨峴別宮以居之列聖誌狀孝宗生四五歲屹然有臣人志十八遭丙子亂丁丑偕昭顯世子質瀋陽相者見之竊相語曰眞王者也淸人將戰欲以昭顯從上常請自往列聖誌狀上與弟麟坪大君㴭自幼同衾枕及登
記聞v1諱淏字靜淵初封鳳林大君乙酉昭顯世子薨封世子卽位葬寧陵初在健元陵內癸丑因石物動退遷葬于呂州弘濟洞癸亥以世室告廟
記聞v1仁祖朝乙酉昭顯世子喪無文可據初因上敎三日入棺以隷字書銘旌以之柩勿設欑宮守墓官以宗室都正爲之罷春坊衛司引文獻通考大明太子
俟百錄v1臣則領敦寧府事李景奭議臣於當初獻議旣以遵先王之制之意對之矣今者許穆以爲非古禮臣不宜更有所議矣而當昭顯世子之喪臣敢以儀禮之制陳章當時亦有聯名同請者仁祖大王援禮難之今時又異於當時卞之則辭說恐煩亦有所不敢更加詢
歷代帝王紀年v01同陵生四男○一子昭顯世子○二嗣孝宗○三子㴭璘坪大君○四子龍成大君
國朝捷錄v01昭顯世子
國朝捷錄v01字復而號月塘衿川人治禮學不參廢母論力斥追崇議以姜嬪夫追禍戊寅拜右文貞公昭顯世子妻父父監司燦金仙源外孫
郯述v01謝吊祭昭顯世子勑謝攝政王致吊謝大君回還請封王世子
文獻攷略v1○仁祖乙酉昭顯世子喪無文可據初因上敎三日入棺以隷字書銘旌以之柩勿設欑宮守墓官以宗室都正爲之罷春坊衛司引文獻通考大明太子
靑邱風雲v1嗣孝宗大王第二一男昭顯世子諱配愍懷嬪衿川姜氏右議政碩期女三男麟坪大君㴭四男龍城大君滾以上仁烈王后誕生早卒一男崇善君澂
國朝人物志v2扈聖功贈吏曹判書封完興君子命雄字挺而癸丑生員進士仁祖丙寅文科吏曹參議陪昭顯世子入瀋陽
國朝人物志v3司仁祖追崇章陵之時碩期力爭被門黜之典庚辰拜右議政癸未卒諡文貞國朝榜目女配昭顯世子是爲姜嬪丁亥賜嬪死嬪弟文星等諸弟皆竄
國朝人物志v3陽名對之申得淵以公名書示遂被執北行旣至公改着布衣冠携杖扶人而入不爲揖狂歌而臥辭氣凜然及還昭顯世子送人賜酒公作詩曰經歲遼河故國思一心猶幸近靑闈明朝獨渡遼河去回首靑闈淚滿衣癸未淸以李
國朝人物志v3斥和臣以與虜行遠拔劍叱退曰雖當危忽之際何敢乃爾兪棨在傍見之服其義勇亟加歎服以賓客從昭顯世子于瀋館虜又以淸陰金尙憲北去行遠痛惋憤菀至廢寢食虜亦服行遠之忠曰李賓客善
國朝人物志v3字汝思景容弟進士文科歷兩司仁祖朝侍講書筵辭溫氣和開發懇至昭顯世子甚敬重爲江華留守有惠政筆法老而逾遒美朝廷金玉冊寶皆其手寫官至參判人物考
國朝人物志v3字子方延安人監司昌庭子辛未文科補檢閱歷三司隨昭顯世子質于瀋陽與蔡裕後飮酒酣唱庾信賦慷慨相規慟哭瀋中駭焉及歸朝廷罰之丁丑江都陷襘劾相臣
國朝人物志v3扈從請堅守曰自古和議乖事辛巳李烓以搆誣訴淸公與淸陰金尙憲入瀋陽被囚夷然少無色變昭顯世子明其誣事遂已諡文敬朝野輯要子最字季良號春沼進士文科檢閱作家禮說累萬言官
國朝人物志v3字震伯溫陽人斗卿再從弟庚寅文科壯元丁丑昭顯世子北行從官多避雷卿以文學慨然請行世子在瀋雷卿掌錢穀世子有私請雷卿輒極諫同僚有嚴不律
國朝人物志v3晉州人丁丑以侍講院吏陪昭顯世子入瀋陽弼善鄭雷卿嫉鄭命壽欲以計除之察孝元忠信可仗往復謀議之際孝元必與焉及其
國朝人物志v3仁祖有七男一女仁烈后韓氏誕五男昭顯世子孝宗及麟坪大君龍城大君滾而第五男未娶早卒貴人趙氏生崇善君澂樂善君潚及
國朝人物志v3丁丑昭顯世子以質入瀋陽也具綾川仁厚薦八壯士從行曰朴培元趙壤申晉翼張愛聲吳孝誠金志雄
國朝人物志v3晉州人昭顯世子質於淸孝元以院吏隨行入瀋弼善鄭雷卿察其忠信可仗甚重之殷山人鄭命壽爲虜倀鬼
國朝人物志v3字君澤號竹堂高靈人末舟七代孫庚午進士丙子文科陪昭顯世子入瀋陽還奉使入日本官至參判弟混字元澤號初菴有文名甲申文科校理上同盧協字
國朝人物志v3漢圍城時軍卒爭逼行宮請縛送斥和臣于敵陣連日呼譟而獨時白所領軍卒一不離次上下賴以安爲兵曹判書昭顯世子卒元孫幼上欲立孝宗爲世子以問群臣時白與李敬輿獨主立世孫之論孝宗庚寅拜右相至
國朝人物志v3前按嶺南聲績大著及是益自奮修或有妖言挾虜售奸者竝斬以徇人皆股栗以比張詠之鎭蜀有妖僧詣闕自稱昭顯世子上命公卿集議首相許積懷邪持兩端群奸環坐目攝耳語公直入曰君輩何似傳法羅漢也卽因嶲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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