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구(李俊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900AD6CB1609X0 |
자(字) | 자교(子喬) |
생년 | 1609(광해군 1) |
졸년 | 1676(숙종 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성주(星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언직(李彦直) |
[상세내용]
이준구(李俊耉)
1609년(광해군 1)∼1676년(숙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교(子喬). 군수 이언직(李彦直)의 아들이다. 홍영(洪霙)의 문인이다.
1637년(인조 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지평을 거쳐 1652년(효종 3) 필선이 되었다.
1657년에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음해에 돌아와서 사간이 되었다.
1659년(현종 즉위)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기년설(朞年說: 만1년복)을 주장하여 이를 실시하게 하였다. 이어 헌납을 거쳐 장령‧집의‧사간‧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65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때마침 영동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으므로, 조정에 곡식을 극력 요청하여 기민(飢民)들을 진구(賑救)하였다.
1667년 승지가 되고, 1670년 예조참의‧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에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673년 경기관찰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 예조참판이 되고 이해 제2차예송이 일어나자 예관으로서 대공설(大功說: 9개월복)을 주장, 남인의 기년설과 맞서서 대항하다가 남인의 주장이 관철되자 서인의 몰락과 함께 파직되었다.
1637년(인조 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지평을 거쳐 1652년(효종 3) 필선이 되었다.
1657년에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음해에 돌아와서 사간이 되었다.
1659년(현종 즉위)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기년설(朞年說: 만1년복)을 주장하여 이를 실시하게 하였다. 이어 헌납을 거쳐 장령‧집의‧사간‧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65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때마침 영동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으므로, 조정에 곡식을 극력 요청하여 기민(飢民)들을 진구(賑救)하였다.
1667년 승지가 되고, 1670년 예조참의‧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에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673년 경기관찰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 예조참판이 되고 이해 제2차예송이 일어나자 예관으로서 대공설(大功說: 9개월복)을 주장, 남인의 기년설과 맞서서 대항하다가 남인의 주장이 관철되자 서인의 몰락과 함께 파직되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성명 : "이준구(李俊耉)"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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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