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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李袤)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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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연지(延之)
호(號)과암(果菴)
생년1600(선조 33)
졸년1684(숙종 10)
시대조선중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경전(李慶全)
조부이산해(李山海)
증조부이지번(李之藩)
유희발(柳希發)
외조부김첨(金瞻)

[상세내용]

이무(李袤)
1600년(선조 33)∼1684년(숙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과암(果菴).

증조부는 이지번(李之藩)이고, 조부는 문형(文衡) 이산해(李山海)이며, 부친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경전(李慶全)이다. 모친은 김첨(金瞻)의 딸이고, 부인 유희발(柳希發)의 딸 사이에 첨지사(僉知事) 이인빈(李寅賓)을 두었다.

1629년(인조 7) 기사별시문과(己巳別試文科)에 병과(丙科) 1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1641년 정언(正言)에 이어 1646년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병으로 사직한 후 다시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러나 1649년 허목(許穆)과 같이 폐고(弊錮)되었다가 복직하여 1650년 해미현감(海美縣監)을 지냈고 1652년 지평(持平), 서천군수(舒川郡守)를 거쳐 1656년 필선(弼善), 1657년 헌납(獻納)집의(執義)사간(司諫)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에 보덕(輔德)을 지냈다.

1660년(현종 1)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복상(服喪) 문제로 남인(南人)의 윤선도(尹善道)가 유배되자 사직했다가 1675년에 대사헌을 지냈고 이듬해에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 이때 정여립(鄭汝立)의 난, 즉 기축옥사에 연좌되어 처형된 백유양(白惟讓)의 신원과 정개청(鄭介淸)의 서원복구를 상소하였다. 그 후 행사직(行司直)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성(大司成)대사헌우참찬(右參贊)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80년(숙종 6)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를 올려 ‘행사직 이무(李袤)는 성품이 흉하고 간휼하며 세리(勢利)라면 손대지 않는 데가 없었는데 권문에 의탁하여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고 탄핵하였다. 이로 인해 관직이 삭탈되었고, 이성(利城)덕원(德源)으로 유배 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오윤정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