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극창(韓克昌)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55CADF9CC3DB1600X0 |
자(字) | 유백(裕伯) |
호(號) | 오주(鰲洲) |
생년 | 1600(선조 33) |
졸년 | 1650(효종 1)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주(淸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한위(韓瑋) |
생부 | 한서(韓瑞) |
[관련정보]
[상세내용]
한극창(韓克昌)
1600년(선조 33)∼1650년(효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유백(裕伯), 호는 오주(鰲洲).
한서(韓瑞)의 아들로, 한위(韓瑋)에게 입양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되고, 163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이 되었으나 권신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다가 함창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났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후진양성에 힘쓰던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다.
강화에 극력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우와 함께 영해에 은거하였다.
1646년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 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유배당한 좌의정 이경여(李敬輿),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을 옹호하는 소를 올리는 한편 「백설가(白雪歌)」를 지어 이경여의 피화(被禍)를 한탄하였다.
한서(韓瑞)의 아들로, 한위(韓瑋)에게 입양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되고, 163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찰방이 되었으나 권신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다가 함창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났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후진양성에 힘쓰던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다.
강화에 극력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우와 함께 영해에 은거하였다.
1646년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 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유배당한 좌의정 이경여(李敬輿),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을 옹호하는 소를 올리는 한편 「백설가(白雪歌)」를 지어 이경여의 피화(被禍)를 한탄하였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嶺南人物考
嶺南人物考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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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