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鄭瀁)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815C591FFFFB1600X0 |
자(字) | 안숙(晏淑) |
호(號) | 포옹(抱翁) |
시호(諡號) | 문절(文節) |
생년 | 1600(선조 33) |
졸년 | 1668(현종 9)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영일(迎日)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종명(鄭宗溟) |
조부 | 정철(鄭澈) |
[상세내용]
정양(鄭瀁)
1600년(선조 33)∼1668년(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안숙(晏淑), 호는 부익자(孚翼子)‧포옹(抱翁).
정철(鄭澈)의 손자이며, 강릉부사 정종명(鄭宗溟)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신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
난 후 수년간 은거생활을 하다가 동몽교관에 제수된 뒤 의금부도사‧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수운판관을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 1) 용안현감으로 나가 치적(治蹟)을 올렸으며, 이후 비안현감‧종부시주부‧진천현감‧금구현령‧한성부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1661년 지평으로 발탁되었으나 교리 민유중(閔維重)으로부터 인망(人望)에 부응(浮應)하는 인물이라는 탄핵을 받은 바 있었다.
이후 간성군수‧시강원진선을 거쳐 1668년 장령에 이르렀으며, 이해에 죽었다. 『어록해(語錄解)』를 중수, 간행하였다.
초시(初諡)는 정절(貞節)이었으나 뒤에 문절(文節)로 개시되었다.
정철(鄭澈)의 손자이며, 강릉부사 정종명(鄭宗溟)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신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
난 후 수년간 은거생활을 하다가 동몽교관에 제수된 뒤 의금부도사‧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수운판관을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 1) 용안현감으로 나가 치적(治蹟)을 올렸으며, 이후 비안현감‧종부시주부‧진천현감‧금구현령‧한성부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1661년 지평으로 발탁되었으나 교리 민유중(閔維重)으로부터 인망(人望)에 부응(浮應)하는 인물이라는 탄핵을 받은 바 있었다.
이후 간성군수‧시강원진선을 거쳐 1668년 장령에 이르렀으며, 이해에 죽었다. 『어록해(語錄解)』를 중수, 간행하였다.
초시(初諡)는 정절(貞節)이었으나 뒤에 문절(文節)로 개시되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典故大方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典故大方
燃藜室記述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명 : "양(瀁)"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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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