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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량(金元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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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명숙(明叔)
호(號)율촌(栗村)
시호(諡號)강민(剛愍)
생년1589(선조 22)
졸년1624(인조 2)
시대조선중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변(金汴)
공신호정사공신(靖社功臣)

[상세내용]

김원량(金元亮)
1589년(선조 22)∼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명숙(明叔), 호는 미촌(蘪村)율촌(栗村). 기묘명현(己卯名賢) 김정(金淨)의 후손이며, 김변(金汴)의 아들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며, 고려 말기부터 대대로 보은에 거주하였다. 나만갑(羅萬甲)조직(趙溭) 등과 교우관계가 깊었다. 유생의 몸으로서 이시백(李時白)의 권유로 인조반정의 모의에 참여했으나, 거사당일의 군사행동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인조를 맞이하는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반정이 성공한 뒤 논공행상을 할 때 이후원(李厚源)과 함께 극력 사양했으나,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봉되고,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공조좌랑을 거쳐 김집(金集)과 함께 학행으로 추천받아 지평(持平)에 발탁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모반에 대한 고변이 있자, 이를 믿지 않고 백방으로 이괄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모반사실이 분명하여짐에 따라 승지 김자점(金自點)의 건의로 투옥되었고, 이어 반란군의 공격으로 조정이 피난할 때 적에게 이용될 염려가 있다는 김자점의 주장에 따라 옥중에서 참살당하였다.

1661년(현종 2) 부인 이씨의 송원(訟寃)으로 훈작(勳爵)이 복구되고 호조판서월성군(月城君)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강민(剛愍)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