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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권(金是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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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중(子中)
호(號)봉파(鳳坡)
생년1583(선조 16)
졸년1634(인조 12)
시대조선중기
본관의성(義城)
활동분야기타 > 처사
김집(金潗)
조부김성일(金誠一)
처부변경회(邊慶會)
외조부유종례(柳宗禮)
묘소의성(義城)
묘소임기(林基)

[상세내용]

김시권(金是權)
1583년(선조 16)∼1634년(인조 1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자중(子中), 호는 봉파(鳳坡).

조부는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이고, 부친은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지낸 김집(金潗)이다. 외조부는 유종례(柳宗禮)이고, 처부는 변경회(邊慶會)이다. 권익창(權益昌)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8)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51위로 합격하고, 1630년(인조 8)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로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냈다. 1634년(인조 12)에 성균관학유학록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8세 때 어머니가 악성 종기로 인한 통증으로 밤새 고통스러워한 일이 있었는데, 그도 아픔을 못이겨 그치지 않고 소리를 지르니 아버지가 그 까닭을 묻자, “어머니가 통증을 견디지 못하시니, 저 또한 아픈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아픈 곳이 있어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11세 때 할아버지 문충공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50리 길을 슬피 울며 따라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대간(大諫) 고경명(高敬命)이 그 가족을 김집에게 의탁하였는데, 김집이 분상을 가면서 열 살을 겨우 넘긴 김시권에게 돌보아주도록 하니 그가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고경명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례를 치르도록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니, 사람들이 역시 학봉 노인의 손자라고 일컬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홍조(李弘祚) 등과 의병을 일으켜 조령을 넘으려는 즈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갔다. 묘소는 의성(義城)의 북쪽 임기(林基)의 병향(丙向)에 있다.

[참고문헌]

朝鮮文科榜目
嶺南人物考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