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유성증(兪省曾)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20C131C99DB1576X0
자(字)자수(子修)
호(號)요곡(拗谷)
생년1576(선조 9)
졸년1649(인조 27)
시대조선중기
본관기계(杞溪)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대의(兪大儀)

[상세내용]

유성증(兪省曾)
1576년(선조 9)∼1649년(인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자수(子修), 호는 우곡(愚谷)요곡(拗谷).

선무랑 유대의(兪大儀)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에 사마시를 거쳐, 1619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대북파를 싫어하여 사직하고, 조도사(調度使) 이창정(李昌庭)의 막하가 되었다.

호조좌랑으로 있을 때 그의 아우 유세증(兪世曾)이이첨(李爾瞻)과 가까이하여 그를 괴롭혔으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이때 영남유생들이 이이첨을 논책하는 상소를 하였는데 그 상소문을 그가 썼던 탓으로 투옥 당하였다. 한달 후에 신병으로 출옥하였으며,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용서를 받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지평으로 인조를 강화에 호종하고 척화를 주장하였다.

그뒤 집의로 있을 때에는 호란 후의 수습책으로 양전(量田)의 실시, 대동법(大同法)의 실시, 부역의 공평부과, 절행(節行)의 표창 등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뒤 장령수찬사간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로 들어가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활약하였으며, 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뒤에 강원도관찰사예조참의 등을 지냈다.

사람됨이 돈후하고 충신하여 장자(長者)의 풍모를 갖추었으며, 논의(論議)를 즐겨하지 않았고, 인심을 수습하여 천재를 막는 것에 그의 뜻을 두어 대주부(大州府)에 결원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가 물망에 올랐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