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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남(吳信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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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575(선조 8)
졸년1632(인조 10)
시대조선중기
본관평해(平海)
활동분야무신 > 무신
출신지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 군동면(郡東面) 안지(鴈池)
묘소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덕천리(德川里)

[상세내용]

오신남(吳信男)
1575년(선조 8)∼1632년(인조 10).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 군동면(郡東面) 안지(鴈池) 출신이다. 1594년(선조 27)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사포수군첨절제사(宣沙浦水軍僉節制使), 도총도사훈련원정(都摠都事訓練院正)을 역임했다. 1610년(광해군 8) 안흥량수군첨절제사(安興梁水軍僉節制使)로 재임할 때, 모울도(慕蔚島) 해상에서 왜선을 추격하여 전멸시키고 왜장 등 16명을 생포하여 조정으로부터 초포상(勦捕賞)과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직위를 받았다. 1618(광해군 10)에 도원수중군에 제수(除授)되고, 다음 해 2월에 명나라후금 정벌 전투에 강홍립(姜弘立)을 총사령관으로 편성한 조선군 원병으로 참여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3월 심하전투(深河戰鬪)에서,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조선군이 어쩔 수 없이 출병하였음을 알리고 후금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되어서도 의리로 저항하다가, 목책 안에서 9년 동안 갇혀 지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홍립, 박난영(朴蘭英)과 함께 입국하여 강화에서 화의를 주선하고, 1630년(인조 8)에 추신사(秋信使)로서 심양(瀋陽)에 다녀왔다. 이에 인조는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친필 어병(御屛)을 하사하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사람을 보내어 제문과 비장구 2품을 또 하사하였다.

묘소는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덕천리(德川里)에 있으며, 이 곳의 덕호사(德湖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조선왕조실록
果菴集
고전번역원(http://www.itkc.or.kr/)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kyujanggak.snu.ac.kr/)

[집필자]

전종헌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5-03존재집 오신남 행장을 참고하여 생년을 1574년(갑술)에서 1575년(을해)으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