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허(崔應虛)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D5CC751D5C8B1572X0 |
자(字) | 공진(拱辰) |
생년 | 1572(선조 5) |
졸년 | 1636(인조 1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최완(崔𡸥) |
조부 | 최언방(崔彦邦) |
증조부 | 최수준(崔秀俊) |
외조부 | 최노식(崔盧植) |
[관련정보]
[상세내용]
최응허(崔應虛)
1572년(선조 5)∼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진(拱辰). 최수준(崔秀俊)의 증손으로, 조부는 최언방(崔彦邦)이고, 부친은 최완(崔𡸥)이며, 모친은 최노식(崔盧植)의 딸이다.
그는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합격한 뒤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선조대에는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편수관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에는 서장관으로서 중국과의 외교문제를 잘 해결하였다 하여 진주사(陳奏使) 민형남(閔馨男), 부사 허균 등과 함께 전답 10결(結)과 노비 2구를 하사받았다.
1611년(광해군 3)에는 경기도사로서 서경덕(徐敬德)의 치제관(致祭官)을 맡았다. 그 뒤 사헌부장령‧승정원승지‧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나, 인조반정 후 이이첨(李爾瞻)의 일당으로 폐모론에 앞장섰다 하여 탄핵되었다.
그는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합격한 뒤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선조대에는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편수관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에는 서장관으로서 중국과의 외교문제를 잘 해결하였다 하여 진주사(陳奏使) 민형남(閔馨男), 부사 허균 등과 함께 전답 10결(結)과 노비 2구를 하사받았다.
1611년(광해군 3)에는 경기도사로서 서경덕(徐敬德)의 치제관(致祭官)을 맡았다. 그 뒤 사헌부장령‧승정원승지‧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나, 인조반정 후 이이첨(李爾瞻)의 일당으로 폐모론에 앞장섰다 하여 탄핵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대표명 | 최응허(崔應虛) |
성명 | 최응허(崔應虛) |
성명 : "최응허(崔應虛)"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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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