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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성(朴孝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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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원(百源)
호(號)진천(眞川)
생년1568(선조 1)
졸년1617(광해군 9)
시대조선중기
본관고령(高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정(朴淨)
외조부채응상(蔡應祥)

[상세내용]

박효성(朴孝誠)
1568년(선조 1)∼1617년(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백원(百源), 호는 진천(眞川).

교위(校尉) 박정(朴淨)의 아들이며, 모친은 생원 채응상(蔡應祥)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시폐(時弊)에 대하여 통렬한 어조로 소를 올려, 신흠(申欽)으로부터 임진왜란 이후 제일가는 진언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 유격(游擊) 마정문(馬呈文)접반관(接伴官)으로 영남에 다녀왔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 한준겸(韓浚謙)종사관이 되었다가 이어 전적(典籍)공조병조예조좌랑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러나 1596년에 올린 상소내용이 말썽이 되어 외직으로 나가게 되어 연서도찰방(延曙道察訪)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대동도찰방 등을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서 선정을 베풀었다.

1612년(광해군 4)에 단천군수가 되어서도 포상을 받고 선정비가 세워졌다. 엄격한 성격에 책임감이 강하였고, 평소 김상헌(金尙憲)조정호(趙廷虎) 등과 친교가 있었다.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