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익(趙守翼)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C218C775B1565X0 |
자(字) | 시보(時保) |
호(號) | 자오(自娛) |
생년 | 1565(명종 20) |
졸년 | 1602(선조 3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풍양(豊壤)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정기(趙廷機)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수익(趙守翼)
1565년(명종 20)∼1602년(선조 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시보(時保), 호는 자오(自娛).
홍문관응교 조정기(趙廷機)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자립하여, 1590년(선조 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하직하고 죽음으로써 관직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이미 묘사(廟社)가 옮겨졌고 궁성이 비었음을 알고, 국왕이 계신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검열에 제수되었다.
이후 주서‧봉교‧사서, 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예조정랑‧전라도사‧병조정랑‧홍문관부수찬‧부교리, 임천군수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뒤 병을 얻어 고향에 돌아와 죽었다.
사후 1603년에 호성선무종훈녹권(扈聖宣武從勳錄券)이 내려졌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조용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생활이 청빈하였다.
홍문관응교 조정기(趙廷機)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자립하여, 1590년(선조 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하직하고 죽음으로써 관직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이미 묘사(廟社)가 옮겨졌고 궁성이 비었음을 알고, 국왕이 계신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검열에 제수되었다.
이후 주서‧봉교‧사서, 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예조정랑‧전라도사‧병조정랑‧홍문관부수찬‧부교리, 임천군수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한 뒤 병을 얻어 고향에 돌아와 죽었다.
사후 1603년에 호성선무종훈녹권(扈聖宣武從勳錄券)이 내려졌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조용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생활이 청빈하였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용곤(金鎔坤)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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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