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해(吳允諧)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24C724D574B1562X0 |
자(字) | 여화(汝和) |
호(號) | 만운(晩雲) |
생년 | 1562(명종 17)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해주(海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오희인(吳希仁) |
생부 | 오희문(吳希文) |
[관련정보]
[상세내용]
오윤해(吳允諧)
1562년(명종 17)∼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화(汝和), 호는 만운(晩雲).
부친은 오희문(吳希文)이며, 큰아버지 오희인(吳希仁)에게 입양되었다. 문사에 뛰어나 시와 표(表)에 능하였다. 선조 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가 되고 그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수찬‧교리‧응교‧예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뒤 여주목사로 나갔다.
성품이 관대하여 남의 잘못을 탓하지 아니하나 공무집행에 있어서는 엄격한 규율을 지키고 공사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
백성을 사랑하여 농업을 권장하고 학문을 진작하며 필요없는 부역과 남세(濫稅)를 경감하여 주민의 노역을 덜어주는 등 애민정치에 힘썼다. 흉년에 창고를 열어 기민을 진제(賑濟)하여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강화가 성립되자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산중에 은거하였다.
부친은 오희문(吳希文)이며, 큰아버지 오희인(吳希仁)에게 입양되었다. 문사에 뛰어나 시와 표(表)에 능하였다. 선조 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가 되고 그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수찬‧교리‧응교‧예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뒤 여주목사로 나갔다.
성품이 관대하여 남의 잘못을 탓하지 아니하나 공무집행에 있어서는 엄격한 규율을 지키고 공사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
백성을 사랑하여 농업을 권장하고 학문을 진작하며 필요없는 부역과 남세(濫稅)를 경감하여 주민의 노역을 덜어주는 등 애민정치에 힘썼다. 흉년에 창고를 열어 기민을 진제(賑濟)하여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강화가 성립되자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산중에 은거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晩雲集
國朝榜目
晩雲集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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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