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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후(高因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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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선건(善健)
호(號)학봉(鶴峰)
시호(諡號)의열(毅烈)
생년1561(명종 16)
졸년1592(선조 25)
시대조선중기
본관장흥(長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고경명(高敬命)

[상세내용]

고인후(高因厚)
1561년(명종 16)∼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峰).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며,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의 아우이다.

1577년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에 이어 승문원정자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관군을 이끌고 북상, 공주에 이르러 선조가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 귀향시켰다.

이때 광주의 향리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들을 다시 모아 형 고종후와 함께 수원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정윤우(丁允祐)에게 인계하고 행재소로 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귀향중에 북상중인 아버지의 의병 본진과 태인(泰仁)에서 합류하였다.

의병이 여산(礪山)에 이르러 황간(黃澗)영동(永同)의 왜적이 장차 전라도로 침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금산에서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방어하기로 하였으나, 왜적이 침입하자 관군이 먼저 붕괴되고, 이에 따라 의병마저 무너져 아버지 고경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예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광주포충사(褒忠祠), 금산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湖南三綱錄
湖南節義錄

[집필자]

송정현(宋正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