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일(申忠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2E0CDA9C77CB1554X0 |
자(字) | 서보(恕甫) |
생년 | 1554(명종 9) |
졸년 | 1622(광해군 1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평산(平山)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신묵(申黙) |
[상세내용]
신충일(申忠一)
1554년(명종 9)∼1622년(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서보(恕甫).
부친은 면천군수 신묵(申黙)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등용되었다. 강진‧고산현감을 역임하고, 1595년 남부주부(南部主簿)로 있을 때, 임진왜란으로 전쟁중인 우리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통호(通好)를 요구하는 등 심상치 않은 태도를 보이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동정을 탐지해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해 12월 만포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의 여희윤(余希允)과 누루하치(奴兒哈赤: 뒤의 淸太祖)의 거성(居城)에 들어가 그들의 발호에 대한 명나라의 뜻을 전하고 그들의 동정과 산천‧풍습 등을 살펴 이듬해 1월 귀국, 복명하면서 한만사연구(韓滿史硏究)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를 작성하여 올렸다. 귀국한 그해에 함흥판관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중 금산전투 때 무단이탈한 죄와 누루하치에게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의 예를 올려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그뒤 복관되어 1599년 김해부사가 되고 1615년(광해군 7) 첨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수군절도사‧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묵죽에 뛰어나 이정(李霆)과 함께 양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면천군수 신묵(申黙)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등용되었다. 강진‧고산현감을 역임하고, 1595년 남부주부(南部主簿)로 있을 때, 임진왜란으로 전쟁중인 우리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통호(通好)를 요구하는 등 심상치 않은 태도를 보이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동정을 탐지해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해 12월 만포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의 여희윤(余希允)과 누루하치(奴兒哈赤: 뒤의 淸太祖)의 거성(居城)에 들어가 그들의 발호에 대한 명나라의 뜻을 전하고 그들의 동정과 산천‧풍습 등을 살펴 이듬해 1월 귀국, 복명하면서 한만사연구(韓滿史硏究)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를 작성하여 올렸다. 귀국한 그해에 함흥판관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중 금산전투 때 무단이탈한 죄와 누루하치에게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의 예를 올려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그뒤 복관되어 1599년 김해부사가 되고 1615년(광해군 7) 첨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수군절도사‧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묵죽에 뛰어나 이정(李霆)과 함께 양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淸初の疆域‧續―申忠一の建州紀程圖記を中心といて―(三田村泰助, 朝鮮學報 36, 1965)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淸初の疆域‧續―申忠一の建州紀程圖記を中心といて―(三田村泰助, 朝鮮學報 36, 1965)
[집필자]
정하명(鄭夏明)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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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